오늘 우리는 맥추절을 맞아 하나님께 맥추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6개월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여러가지 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비록 우리가 깨닫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여러가지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되어진 일들은 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속에서 우리가 이날 이때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맥추절을 통해서 다시한번 깨닫습니다. 평소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더라도 맥추절이라는 성경에 나오는 절기가 있어서 우리에게 주셨던 은혜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어버이날이 있어서 어버이의 은혜를 다시금 되집어보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맥추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그 도우심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다면 참으로 우리에게 이 시간은 유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감사가 있다면 우리는 더 나아가서 다시 하나님께 간구하며 기도하면서 새롭게 시작되는 6개월을 주님께 의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이에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그 사람과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해주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다시금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도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늘 이러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음을 발견합니다. 기뻐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감사하는 것, 그리고 다시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것, 이것이 반복될 때에 정말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셨고 그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입니다. 그 뜻을 잘 따르는 자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할 것입니다. 그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정말 항상 기뻐하려고 할 것입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지금은 항상, 쉬지않고, 범사에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일단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다보면 점차 좋아지고 점차 발전하고 마침내 그렇게 되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도와주십니다. 그 뜻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혹시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 수 없었다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룬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가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 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5장 16,17,18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살게 되기를 원하지만 그게 잘 안되는 사람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원하지만 잘 안되는 사람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좀더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반드시 될 것이니까요. 문제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우리에게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두 개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세계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탄의 자녀가 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 두 세계, 두 종류의 사람들 속에서 우리들은 사탄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녀도 예배는 드려도 성경공부는 해도 진심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기는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 안다니고 예배도 안드리고 성경공부도 안한다면 더욱 더 불가능하겠지만 그런 교회생활을 한다 하다라도 쉽지 않은 것이 바로 주님을 믿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저쪽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지함과 죄성에 갇혀서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들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은 그들이 이쪽으로 넘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설득하고 때로는 권면하고 때로는 사랑하고 때로는 인내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이쪽으로 넘어오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살아있는 한 이쪽으로 넘어와서 주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기뻐하며 기도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뜻을 깨달은 우리들은 힘을 다하여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일이 이쪽에서도 일어납니다.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왔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이쪽에 있는 사람들을 끌고 가버리는 것입니다. 혹은 이쪽에 있는 사람들이 저쪽으로 스스로 넘어가 버리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믿게 되고 예전에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게 되어 버립니다. 그런 상태는 몸과 마음에서 각각 일어납니다. 몸이 이쪽에 있더라도 마음은 저쪽에 가있을 수 있습니다. 몸은 이곳에서 맥추절 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마음은 저쪽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마음은 이곳에 속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작 몸은 저쪽에 넘어가서 하나님께 마땅한 감사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죄의 욕심과 사망의 유혹이 우리를 잡아당깁니다. 지금 내가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되는 세상이 주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등으로 저쪽으로 넘어오라는 손짓을 받고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정말 그런 유혹을 받아서 넘어가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감사하고 기도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그런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벌써 눈이 다릅니다. 온화한 눈이 아니라 화난 눈입니다. 표정이 다릅니다. 밝고 환한 표정이 아니라 어둡고 침울한 표정입니다. 이 자리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변을 한번 둘러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명령이지만 그 명령을 지키면 우리에게 손해날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서 더욱 기뻐하게 되고 더욱 기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에게 막대한 손해가 생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원수관계가 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대적관계가 되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커다란 문제가 생깁니다. 바로 몸과 영혼이 피폐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영혼과 몸이 주님의 은혜가운데서 온전히 보전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23절에서 그것을 발견합니다.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히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그것을 원한 이유는 사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히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으로 기뻐하며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살아서 주의 재림을 본다면 그 재림의 시간에 흠없이 보전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그 전에 일찍 부르심을 받아서 천국에 가게 된다면 그때에도 역시 흠없이 보전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간절히 원하신 이유는 우리가 주님안에서 살지 않는다면 정말로 기뻐하며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보전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결국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명령은 폐하여지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대신 우리는 그 명령을 지키지 않는 댓가를 자연스럽게 치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요. 자동차를 운전하는 여성운전자들은 차를 잘 관리합니다. 청소하고 세차하고 깨끗하게 사용합니다. 다만 한가지를 잘 하지 않는데 그것은 엔진관리를 하지 않습니다. 한번도 엔진덮개를 열어보는 적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자동차 수리업자가 그런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한 여성분이 차를 정비소에 끌고 왔는데 차가 잘 달리지 않는다고 해서 엔진덮개를 열어보니 엔진오일이 떡이 되어있더랍니다. 지금까지 차를 산 뒤로 한번도 엔진청소를 해준 적도 없고 정비소에 가본 적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름 투덜대는 것은 왜 자신은 그동안 자동차 관리를 잘 해왔는데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느냐는 것이었지요. 아무리 관리를 잘 해도 할 것을 하지 않으면 자연히 문제가 생기는 법인 것입니다.
성도들은 열심히 전도를 해서 불신자들을 구원을 받게 하고 믿음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꾸준히 다니게 합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전도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인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당연히 문제가 생깁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리고 십일조를 하고 기도회에 참석한다고 해서 다시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인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여기 저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런 문제가 모이고 모여서 스트레스가 되고 그런 스트레스가 모이고 모여서 급기야 몸에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그래서 병을 갖게 되었습니다. 스트레스로 인한 망막염은 결국에는 수술을 받고서야 나을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수술을 통해 낫는 병이었으니 망정이지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더 심해져서 수술로도 나을 수가 없었다면 얼마나 괴로워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스트레스로 인해서 감정의 골로 인해서 우리 영혼과 몸이 보전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우리 몸이 지나친 감정으로 탈진되어서 결국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게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가 이런 악한 감정으로 인해 시작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지나친 분노가 우리로 하여금 담배를 피우게 한다는 것을 그래서 폐를 상하게 한다는 것을 주님을 아십니다. 지나친 절망이 우리로 하여금 술을 먹게 하고 그래서 간을 상하게 한다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지나친 수치심이 우리로 하여금 인터넷이나 도박이나 음란물로 빠지게 해서 결국 몸을 망치게 한다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그 분노, 절망, 수치심…그것들은 모두 어디서 온 것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 온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이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런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나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 죄가 잉태하여 사망을 낳을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 사망의 상태에 이르게 되기 전에 주님은 우리가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온전히 사람을 바라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3장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느부갓네살의 신상을 섬기는 것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만약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느부갓네살의 신상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느부갓네살 신상도 섬기면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겠지만 그건 사실 거짓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느부갓네살을 섬기든지 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선택상황에 놓이게 되면 둘 다를 선택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정말 하나님을 섬기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직 내가 손해를 볼 것인가 안볼 것인가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꼭 둘 다를 선택해야 하고 그러면 사실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직 자신만 선택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선택하면 반드시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선택한 일의 가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자신들이 하나님을 선택하면 평안이 따르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풀무불에 집어 넣는다고 위협혔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기로 결심합니다. “단3:17,18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감사의 댓가가 별것 아니라면 그리고 감사로 인해서 손해를 보게 된다면 우리는 과연 감사를 할 수 있을까요? 감사를 해야 더 많은 감사가 생긴다고 해야 조금 감사를 할 둥 말 둥 할 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고 그로 인한 어려움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진정한 감사를 하게 되는 것이고 정말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저는 ‘하늘의 특별검사’김인호 장로님의 감사를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검사로서 일산지청장을 지냈을 때 매우 어려움 상황에 직면했었습니다. 정부의 매우 높은 분이 오셔서 회식을 하게 되었을 때 술을 마실 것을 요구받았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술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일산지청장으로 근무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했는데 그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술을 먹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결국 그분은 다음 인사때에 부산지검으로 전보조치되었습니다. 이일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고 그는 자신이 술을 먹지 않아서 그 높은 분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그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잘되서 감사하면 감사못할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려울때 감사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만이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맥추절을 맞이한 우리는 오늘 정말 좋은 일이 있어서 감사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좋은 일이 없더라도 감사합니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뜻과 상관없이 우리 마음의 만족과 즐거움과 자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며, 기도하며, 감사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도 항상 기뻐하며,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깨닫고 감사의 삶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더욱 더 나아가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맥추절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서 더욱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개요 {4서신서} <4극본> [6결심]-[7실천] 1. 세상에는 감사를 할 줄 아는 사람과 감사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2. 우리는 그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원망 속에서 살아가지 않고 감사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려고 하지만 감사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도 원망 속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3. 그들의 결국은 영혼이 망가지든 혹은 몸이 망가지든 혹은 둘 다 망가지는 삶을 살게 되고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계십니다. 4. 주님은 다시 우리가 늘 기뻐하며 늘 기도하며 늘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속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