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오늘 교사헌신예배에 부르심을 받게 된 것에 대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교사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도우심을 깨달을 수 있는 이 시간에 말씀을 증거하게 된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황해노회 남시찰회에 소속되어 있는 신형교회 담임목사이며, 현재 시찰회에서 회계를 맡고 있습니다. 늘 당회장 목사님을 존경해 왔는데 이자리에 이렇게 불러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부족하지만 교사의 헌신을 위해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나누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날 주일학교의 위기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실제로 각 교회들에서는 주일학교 학생들의 수가 줄어가고 있으며 성도들은 더욱 고령화되고 있는데 젊은층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사회적인 영향이 있고 교회안에서의 대비가 미흡한 것도 있습니다. 위기가 다가오고 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학생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쓰느냐가 현재 당면한 상황이 위기가 될 지 혹은 기회가 될 지를 결정 지을 것입니다.
저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개척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적 상담학이라는 분야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개척으로 인한 제 자신의 괴로움과 그 괴로움을 극복해 나가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성경적 상담학은 아주 적절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성경적 상담학에 대해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이것이 무엇인가를 잠시 설명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상담학은 전부 심리상담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심리상담학은 또한 전부 세속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속적인 심리학으로 상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만으로 상담을 하는 학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적 상담학입니다. 이 성경적 상담학에는 오늘날의 모든 마음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원리가 있습니다. 또한 주일학교에서 학생을 이해하는 법이라든지 교사가 학생에게 대해서 할 수 있는 방법 등과 같은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원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이 모든 것들이 성경적이어서 기독교인이 이해하고 활용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저 자신도 성경적 상담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서 이것을 통해 목회를 하며 상담을 해나갈 수 있었고, 또한 너무나 유용하고 유익하게 지금까지 사역을 잘할 수 있었습니다. 이시간에는 바로 그 성경적 상담학의 내용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제목은 교사의 사명을 이루는 네 가지 방법입니다. 하나 하나의 방법속에 성경적 상담학의 원리가 있습니다. 또한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원리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교사 여러분들이 더욱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함께 하신 성도님들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깨닫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교사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네 가지 방법 중에서 첫 번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자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오늘 성경말씀 중에 나타나있고 성경적 상담학의 중요한 방법론 원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사로서 자신이 받은 사명과 책임을 이루기 위해 중요한 일은 먼저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려고 할 때, 주님께서 하려고 하시는 뜻이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려고 할 때, 주님의 손과 발과 입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려고 할 때, 주님 자신을 교사로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도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누구에게 할 수 있을까요? 바로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이란 교회에서 제일 약한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시작단계에 있는 자들입니다. 나이가 많던 적던, 사회경험이 많던 적던, 일단 믿음이 없다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제일 초보적인 단계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자들을 사랑해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사랑받을 만한 자들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스러운 자들을 사랑하시는 것도 역시 인간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믿음이 없는 자들을 위해 주어집니다. 그들에게 또한 필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을 사랑할 때에 교사로서의 온전한 사명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게 믿음이 없는 자들을 사랑해주시는 주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다음에 제자들 중 두명은 엠마오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주님은 나타나셨습니다. “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까이 하셨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또한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불신앙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요즘 학생들이 얼마나 기성세대의 예측을 뛰어 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전보다도 더 쉽게 범죄에 노출이 되고 쉽게 죄악에 물들어 갑니다. 술, 담배와 음란물과 왕따나 폭행등에 쉽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얌전했던 학생이 어느새 친구들과 어울려 과격하고 강퍅하게 변해버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습니다. 또한 각 학년에서 새롭게 교회를 오는 학생들은 전부 교회에 나가보지 않았던 경우일 것입니다. 이들 역시 세상의 영향과 풍습에 쉽게 동조해 있던 아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자라난 아이들이 그렇고 새로온 아이들이 그러하니 교사는 사랑이라는 실천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들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교사이지만 학생을 거부하는 태도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초등학교 교사가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교사란 직업이 참 좋다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방학이 있지, 사회적인 인식도 좋지, 딱 한가지만 되면 정말 좋다고 했습니다. 그 딱 한가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학생들만 없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스개 이야기이지만 점차 학생들을 무서워한다면 결코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더 큰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교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들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교사가 그렇게 사랑으로 가까이 가다보면 학생들이 점차 말을 하기시작합니다. 그들도 변하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말하고 자신의 고민도 말하기 시작합니다. 사랑으로 다가가면 반드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럴 때 해야하는 일은 그들이 확신이 없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왜 확신이 없게 되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물으십니다.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두 사람은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서 자신들의 고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고민은 그 다음 구절에서 나옵니다. “19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두 제자중 한 사람인 글로바는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생각하고 따랐는데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좌절하고 낙심해 있었던 것입니다. 학생들 중에는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을 이해하지 못해서, 혹은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해서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이 확신 속에는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지 구원의 확신만 없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많은 부분에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교사가 이러한 학생들에게 해줄 수 있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해해주는 일’입니다. 그것을 알아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선생님은 나를 알아주신다는 심적인 연결고리가 있을 때 그 학생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그 얘기를 다 들으셨습니다. 나한테는 그런 얘기 하지 마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를 교사는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사가 자신의 사명을 이룰 수 있는 두 번째 아주 중요한 방법인 것입니다.
학생들은 신학적인 내용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신앙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저런 풀리지 않는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문들을 다 막아놓으면 그들은 흥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런 흥미를 오히려 일으키고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좋은 방법은 그 내용을 잘 들어주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알아주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외국교수님들은 탁월합니다. 그들은 뭔가 질문을 하면 깍아 내리는 법이 없습니다. 대답하기 아주 어려운 질문일 수록 그들은 말합니다. “아주 좋은 질문인데?”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쓸데없는 거 묻지 마라!”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알아주면 알아줄 수록 그들은 마음이 열립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들을 수 있습니다. 학생들의 고민이나 질문에 정말 중요한 것은 대답이 아닙니다. 들어주고 관심을 가져주고 알아주는 교사들의 태도입니다. 그것이 정말 기억에 남습니다.
자, 점차 학생과 교사는 함께 성장해 나갑니다. 학생도 마음이 열렸고 교사도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세번째 방법은 ‘성령충만이 없는 자들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말하라는 중요한 성경적 상담의 방법론적인 원리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것을 누구에게 말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충만이 필요한 자에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에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이전에 이미 믿음을 가졌고 구원의 확신이 있지만 다만 성령충만이 없는 자들에게는 말을 해주어야만 합니다. 과연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두 제자들의 이야기를 다 들으셨습니다. 들으시는 것 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아시고 이해해주셨습니다. 그다음에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성령충만을 위해 필요한 것은 성경말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성경에 쓰여진 예수님에 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이 성령충만이 필요한 자들에게 예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와 같이 ‘성령충만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지, 정, 의’의 측면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지정의’를 닮아서 그분의 형상을 닮아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알게 되고 지적인 부분이 채워지면 그 다음에 감정의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정이 충만해지면 그 다음으로 의지가 생깁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놀라운 감정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성경을 풀어줄 때에 그들의 마음은 열렸습니다. 더이상 낙심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들의 관점에서 예수님은 실패자였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예수님은 승리자였습니다. 마침내 죄인들을 위한 대속사역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에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졌습니다. 어떤 학생이 신학적인 문제를 질문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을 성경을 읽어보면서 찾아갈 때에 그의 마음은 활짝 열렸습니다. 어떤 학생이 인생의 문제를 질문했습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성경속에서 찾았을 때에 그의 고민은 해결되었습니다. 어떤 학생이 자신의 은밀한 죄의 고민을 질문했을 때 역시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새롭게 하심을 발견하고 그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답을 얻을 때에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교사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바로 ‘사명감당이 없는 자들에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중에 죽쒀서 멍멍이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애써서 성령충만을 위해 말해 놓았는데 마지막 할일을 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어버립니다. 그 해야 할 일이란 ‘행하라’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뭔가를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교사가 마지막이 거둘 수 있는 열매는 바로 행함에 있습니다.
때로 분위기도 좋고 관계도 좋았는데 별다른 열매가 나타나지 않아서 그냥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해인가 학생들이 아주 뜨겁고 성령충만도 잘 되었는데 그 이후에 진척이 되지 않는다면 ‘행함’ 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행함은 사명감당이 없는 자들에게 필요합니다. 아무런 책임감도 없고 아무런 할일도 없을 때 충성할 필요도 없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중요한 방법은 바로 그런 사명이 없는자들에게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 뒷 부분에서 우리는 그래서 그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결국에는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게 됩니다. “33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그들은 엠마오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고 있었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에는 다른 제자들이 다 모여 있어서 자신들의 주님을 만난 경험담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도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고백을 통해 예수님께서 과연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자들의 발걸음을 돌리신 것입니다.
학생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신앙고백을 증거하고 전파할 때에 그들은 무엇인가를 행하는 자들이 됩니다. 그들이 끊임없이 모여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며 교제를 나눌 때에 그들은 무엇인가를 행하는 자들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모여서 찬양을 부르고 모여서 봉사를 하고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할 때에 그렇게 하도록 만든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교사들입니다. 그러면 그 교사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이전에 행하신 일들이 바로 지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교사들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다시한번 사랑하고 알고 말하고 행하십시오. LOVE, KNOW, SPEAK, DO라는 말의 각각의 이니셜을 따라, 이것을 LKSD 방법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여러분의 사명을 이루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들은 그리스도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함께 예배드리시는 여러분, 여러분이 교사는 아니더라도 이 원리를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실천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사역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역을 통해 세상인 엠마오로 가지 말고 주님이 기다리시는 예루살렘으로,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