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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40행 9; 15-19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님 (우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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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9; 15-19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님_5

  

 

  

2025. 3. 21. . 금요철야. 우림교회.

  

 

  

*개요: #51계획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9: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하나님께서는 각 성도들에게 크신 계획과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러한 뜻을 이해하고 따라갈 때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구원받은 자로서 그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다른 더 큰 축복이나 상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인들은 놀라운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받은 구원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성도들은 이렇게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매이는 것 같고  손해 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를 더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더 손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보다 더 큰 것이고 그럴 때 영원한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 집에 있을 때 가장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제 그 중요성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계획과 뜻을 받아들이고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할 때 오늘 말씀은 그 방법이 무엇인가를 알게 합니다. 15, 16절을 보십시오.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이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뜻을 알려 주시는데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하나님의 그릇이었습니다.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전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임금들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도 하나님의 이름을 전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 일을 위해 택하신 하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에 나오는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헬라인이었던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전했습니다. 총독 베스도나 헤롯 아그립바왕이나 가이사 황제와 같은 임금들에게도 하나님의 이름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유대인인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나타난 때에는 아직 본격적으로 바울이라는 이름을 쓰기 전인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때였습니다.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직후였던 것입니다. 아직 사울로서의 악명이 더 유명했던 때였습니다. 그가 다메섹에 오려고 했던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더욱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도로 다메섹에 오고 있던 그는 예수님의 밝은 빛이 자신을 비추는 것을 경험하면서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들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대답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했을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로 생각하고 믿는 성도들을 박해했지만 사실 예수님은 진실로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에게 빛 가운데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기 뜻을 실현하려고 할 때에는 예수님을 박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칠 때 사람들의 옷을 받아주는 일을 하는 것이나 다메섹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기 위한 여정을 떠나는 일들이 전부 어리석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를 깨달아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걸 알지 못한다면 어느 새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결혼식에서 사진을 더 잘 찍겠다고 신랑, 신부 앞을 가려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면서 오히려 그 뜻을 가리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제자였던 아나니아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그는 그 경험 이후에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이끌려서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을 앞을 보지 못했고 그 스스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였던 아나니아의 역할은 사울이 주님의 그릇이고 주님이 그에게 그 이름을 위해서 얼마나 고난 받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셔서 준비하게 하실 때에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사울을 바울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바울 만드실 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에 동참할 때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기쁨과 감사와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심을 받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은 결코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순종했던 아나니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그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사울이 바울이 되었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기도를 해주었을 때 사울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이지만 동시에 아나니아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나 그 말씀을 받는 자나 모두가 다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순종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줍니다. 17절입니다.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아나니아는 집에서 나와 사울이 머물던 집을 찾았고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했습니다. 그때 그가 한 말을 보십시오.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사울이 길에서 만났던 예수님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던 사울을 사랑하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그의 죄로 인해 어두워진 눈을 다시 보게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죄많은 그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사울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도우시는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그 말을 해주었고 그래서 사울이 어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지를 알게 하였습니다.

  

그럴 때 일어난 일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충만하게 임하셨을 때 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9: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사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어졌고 다시 보게 되었으며 세례를 받았고 음식을 먹고 나서 강건해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잡고자 했었던 그 제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니 가능한 일이었고 그것이 바로 성령충만의 은혜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이제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로 자신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아나니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사울에게 성령충만을 증거했을 때 그 자신에게도 성령충만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할 일을 지시해주셨습니다. 그에게서도 마음의 비늘이 벗겨져서 사울에 대해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충만한 삶이 바로 이렇습니다. 회개와 순종을 통해 놀라운 성령충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성령충만으로 인해 회개가 온전해졌고 순종이 완성되었으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놀라운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풍성한 기독교 역사가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을 잘 깨닫고 실천하여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뜻에 따르지 못했을 회개하고 돌이키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순종하면서 그 뜻에 연합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온전한 성령충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 역사하심은 오직 성령의 충만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 거룩하신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놀라운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 뜻을 이루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