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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42눅23; 35-46 십자가에서의 자유






눅23;35-46 십자가에서의 자유 




<홍성교회 수요예배 99.1.27>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23: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23:37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23: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23:44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23: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십자가에서의 자유) 오늘 이시간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있었던 사건을 다시 한번 상고하고자 합니다. 늘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자들로서 그 복음의 사건으로 인해 다시 한번 새힘을 얻으며, 그 강렬한 복음의 울림에 함께 공명되어지길 원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마치 소리굽쇠가 일정한 주파수를 내면서 울릴 때, 주변의 모든 동일한 주파수에 따르는 소리굽쇠들이 공명하듯이, 오늘 우리가 보는 이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해 다시한번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마음의 소리굽쇠가 주님의 은혜의 울림으로 말미암아 울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시간으로 3시, 오늘날로 말하자면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세워진 골고다 언덕에는 다른 두개의 십자가도 세워졌습니다. 다른 두개의 십자가에는 두명의 강도가 달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가운데 달리셨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의인이셨고, 흠도 없고 점도 없는 분이셨지만, 강도와 같이, 죄인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의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53장 9절의 예언: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과 같이 된 것입니다. 그분은 의인이셨지만 악인과 동일한 취급을 받으시고 그러한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세개의 십자가가 세워졌고,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차지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 통으로 짠 예수님의 옷이 탐났든지 그들은 옷을 나누어 갖지 않고 한명이 차지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의논하여 제비를 뽑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죄인으로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은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유익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햇빛이 따사로이 내리쪼이는 오전 무렵, [골고다 언덕에는(있는) 세개의 십자가]가 그렇게 덩그러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의 그 찢어지는 비명도 간 곳없고 지금은 간간한 신음소리만이 울릴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구경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였습니다.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고 많은 사람들을 살리시던 그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의 매어 달림을 그들은 그렇게 멀찍이서 팔짱을 끼고 구경만하고 있었습니다.
 관원들은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조롱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소녀야 일어나라. 달리다굼.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가라. 바람아 잔잔하라..... 그 놀라운 기적들은 과거의 일이 되었고, 이제 초라하게 십자가에 못박혀서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들은 마음껏 조롱하였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군병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들은 신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취제역할을 하는 신포도주를 먹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연약한 체력에 도저히 십자가의 그 찢어지는 아픔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고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불쌍히 여겼을 것입니다.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인 패를 달고 그렇게 초라하게 매달려 계신 예수님이 한없이 딱해 보였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 양손에 못을 박을 때,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신응할 뿐인 예수님이 안되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애써서 세상을 구한다고 하지 말고 너나 구원하라. 네 자신이나 구원하라.
뿐만 아닙니다. 옆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도 예수님을 비방하였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행악자는 자신의 잘못과 죄로 인하여 매어달린 것이지만, 당돌하게도 우리를 위하여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자신과 똑같은 죄를 저지른 자인것처럼 그래서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그 행악자는 오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벌을 달게 받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무턱대고 구원해 내라고 악을 썼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려고 괴로움을 이겨가며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에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외칩니다. ‘네가 그리스도라면, 내려와라’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내려와라.’ ‘우리 모든 사람을 구하기 위해 내려와라’
그곳에 매달려 있는 것은 너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야. 그곳에서 그렇게 고통당하는 것은 필요가 없는 일이야. 널 구원해. 널 자유롭게 해. 널 십자가에서 멀리 떨어지게 해. 그렇게 십자가에 바짝 붙어 있지 말고. 이제 너 자신을 위해 너 스스로 구원하란 말이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사탄의 음성으로 외칠 때에 예수님은 아무 말이 없으셨습니다. 사탄이 그렇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의 놀라우신 구원사역을 방해하고자 했을 때에, 예수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더욱 십자가에 바짝 붙었습니다. 십자가에서의 고통을 줄이는 최대한의 방법. 그것은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나무에 더욱 바짝 몸을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제 육시쯤 되었을 때, 해가 빛을 잃었습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제 구시에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쫙 찢어졌습니다. 그 양가죽으로 만든 질긴, 어른의 한뼘 넓이의 그 두꺼운 휘장이 두개로 위에서 아래로 쫙 찢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아무에게도 공개되지 않았던 지성소, 법궤가 있는 곳. 거룩하고도 거룩한 그 곳이 그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주어진 이래 정해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들어갈 수 없었던 그 지성소. 지극히 거룩한 곳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가 개방되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오랫동안 견디었습니다. 오랫동안 참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이르기 전까지는 고통은 그치지 않았고, 안식은 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내 영혼을 아버지에게 부탁할 그 순간에 이르기 전까지 예수님은 끝없는 고통과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젠 때가 되었습니다. 모든 속죄가 완성되고 모든 죄값이 속량된 그제서야,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운명하셨습니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예수님은 진정한 자유로움을 누리셨습니다.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고 그 손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소유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서 우리는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가 골고다 언덕에 이르러 그곳에 십자가를 박고 그 위에 우리의 정과 욕심을 못박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노라면, 어디선가 들리는 수많은 유혹의 음성들이 들려 옵니다. ‘네가 만일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고 싶다면, 내려와라’ ‘네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느냐? 너 스스로나 잘해라.’ ‘네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렇게 살 필요가 없다. 내려 와라. 그리고 너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라’
이러한 유혹의 음성들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어디서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자유로움은 십자가에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더욱 바짝 붙어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로움은 십자가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좀더 가까이 좀더 바짝 우리들의 팔과 다리를, 우리들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 나무에 박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에 대하여 사도바울의 권면을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사도 바울은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사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얽매어 있는 것 같으나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그리고 그 진정한 의미에 대해 그는 고린도 전서 9장에서 결언한 어조로 외치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그는 진정한 자유자 였습니다. 그는 자유가 무엇인지 알았고 그것을 누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유자였기 때문에 자유자로서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4절입니다.   

9:4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9: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9: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9:7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9: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9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9:10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9: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9: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9: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9: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9: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차라리 죽을찌언정..... 애끓는 바울 사도의 외침이 들리십니까? 먹고 마시는 권이 있으나, 쓰지 않습니다. 결혼할 권리가 있으나 쓰지 않습니다. 일하지 않아도 될 권이 있으나, 쓰지 않습니다. 사역의 일로 인하여 사례를 받을 권리가 있으나 쓰지 않습니다. 차라리 죽을찌언정... 왜냐하면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복음이 가리우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이 막히지 않게 하려고 그는 자신의 자유를 가지고 있으나, 쓰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초라하고 비참하게 죽어가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그 모든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을 견디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나약해서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 것입니까? 아니요! 예수님은 그 상황을 뒤집고 그들을 모두 멸하고 이 세상을 그 죄로 심판할 권능이 있으셨지만, 그러나 그 권능을 쓰지 않으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서. 오직 그 사역을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자신을 매어다신 것입니다. 그 모든 인간적인 수모를 다 겪으신 것입니다. 권이 있지만 쓰지 않으신 것입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매달려 있는 내 자신의 십자가에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에 더욱 우리 자신을 기댐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나약한 자유가 아니고, 무능함으로 인한 자유가 아니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능력이 있지만, 단지 사용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 더 가까이 부착함으로써만 자유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안에서의 자유, 십자가에서의 자유를 누리고자 하신다면, 두가지를 기억해 두십시요. 하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빠른 시간내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조롱과 멸시를 생각해 보십시요. 그분은 오전 9시에 달려 오후 3시에 돌아가시기 까지 6시간동안 조롱과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그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기 전까지 그분은 계속되는 유혹과 싸우셨습니다. 바로 내려가고 싶은 유혹. 그만두고 싶은 유혹. 자신의 권을 발휘하고 싶은 충동과 싸우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끝내 승리하셨습니다. 온전히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겨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기쁘게 그 영혼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오랜 시간 십자가에서의 유혹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미혹되지 마십시요. 언제까지라도. 사탄의 유혹에 현혹되지 마십시요. 계속 십자가에 부착해 계십시요. 권이 있으나 사용치 않는 그 자유를 누리십시요.
다른 하나는, 시험은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사탄의 세번째 시험이 무엇이었는지를. 예수님께서 40일동안 금식기도를 하시고 난 뒤, 사탄은 세가지 유혹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그 세번째 시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눅 4:9). 오래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의 그 시험이 이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지만, 처음 시험에서 이기셨던 예수님은 나중 시험에서도 넉넉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시험은 반복된다는 것을 아는 여러분, 지금 당면한 시험을 이기십시요. 지금 당장의 시험을 이기십시요. 그럼 미래의 시험을 이기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유혹을 당하고 있다면 당당하게 물리치십시요. 그러면, 내일의 유혹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듣고 여러분이 무언가를 결심한다면, 그것을 당장 실천하십시요. 유혹에의 승리를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이시간 승리하십시요. 그리고 십자가에 부착하십시요. 그 위에서의 자유를 느끼십시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을 기억하십시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아버지의 손 안에서의 진정한 자유를 느껴보십시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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