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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43요17;1-2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43요17;1-2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2009.7.19-20.주일-월. 청년부 수련회 예배 / 5은혜

우리가 지난 6개월 동안 받은 은혜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을 잘 이겨냈고 맡은 바 책임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담임목사가 자리에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 청년부는 교사로 순장으로 성도로 봉사자로 자기 맡은 책임을 잘 감당했습니다. 늘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구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능히 감당할 만한 힘을 주셨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은혜가 있었기에 우리가 교회를 잘 붙들 수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목표한 일을 잘 이루어나가고 있습니다. 어려운 학업을 잘 끝냈고 또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사와 결혼과 연애와 기타 등등의 일들을 믿음 안에서 잘 해냈습니다. 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충성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새로운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그 힘과 능력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새롭게 길을 열어주시고 더 좋은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번 1박 2일의 짧은 수련회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붙드시고 능력 주셨던 그 힘의 근원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감당할 수 없을것 같지만 그러나 능히 감당해 내는 우리 자신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특별히 하나님의 어떤 역사 속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붙드셨던 능력은 천지를 창조하시는 능력이 아니라, 계획을 이루시는 능력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인내하고 참고 견디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더욱 근거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생수가 어디서부터 흘러나왔는지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그 생수의 근원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 놀라운 힘이 어디서 왔는지를 찾아본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그 힘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우리는 그분의 희생과 인내,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심을 보려고 합니다. 그 근원 속에서 우리가 누렸던 도우심에 대해서 커다란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자 합니다. 그 은혜의 물줄기 안으로 더욱 들어가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부터 2절은 우리가 은혜의 물줄기를 찾아 들어갈 때 제일 먼저 접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의 예수님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예수님의 모습이 여기 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이 아니라 아버지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능력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내내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오랫동안 때를 기다리시던 예수님이 마침내 선언하십니다. '때가 이르렀사오니' 정말 예수님의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침내 인류의 죄값을 감당하실 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고 사명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는 때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이전에 영화롭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영화로우심이 나타나는 때입니다.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셨는지 자기 백성을 얼마나 구원하기를 원하셨는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얼마나 귀한 댓가를 치르셨는지를 보여주는 때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또한 아버지 하나님이 영화롭게 됩니다. 율법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죄사함의 은혜를 주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전에 베일에 가리워져 있었던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리웠던 가죽옷의 비밀과 번제를 통해 죄사함을 이루는 제사의 비밀, 그리고 성전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에 선포되고 설명되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고 영화롭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영화로움이 있습니다. 또한 놀라운 아들 예수님의 영화로움이 있습니다. 이 두 분은 참으로 놀라운 분들입니다. 한 분은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한 구원계획을 수립하셨고 피조물이었던 인간을 그분의 자녀로 삼아주시기로 작정하셨으며, 다른 한 분은 그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비참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셨고 그리고 이제 자신의 생명을 죄인들에 대한 죄값으로, 그리고 그들을 자녀로 삼으시기 위한 대속물로 버리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영화로우심과 예수님의 놀라우신 영광이 이 구원사역을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었던 이 엄청난 구원계획과 은혜로우심에 대해서 선포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이 말씀을 자세히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말이야 이해가 되지만 의미는 쉽게 와닿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게 하실 때에 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을까요?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들은 만민 중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만민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은 아니고 오직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만 영생이 주어집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가 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모든 자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피로 대신해서 그 죄를 용서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하면 재판정에서 판사가 예수님이 되시고 변호사가 예수님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또한 피고인 인간의 모든 죄값에 대해서 그 값을 치루는 변제자가 역시 예수님이십니다. 피고인 인간이 사형을 받았을 때 대신 사형을 받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분이 판사이고 변호사이며 변제자일 뿐 아니라 죄인 대신 죄값을 치루는 대리자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서 이러한 일을 행하실까요? 그 이유는 주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은 친히 그 모든 죄악에 대해서 대리자가 되기를 자처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4절은 바로 이것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정말로 사랑하셨다는 설명보다도 오히려 예수님이 자신의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셨는지를 보는 것이 그분의 사랑을 더 잘 나타냅니다. 그 사랑은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그냥 도와주고 붙들어 주고 인도해 주고 끝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랑은 완전하게도 영원토록 함께 있고자 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이 계시는 곳에 함께 있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주셨던 그 상상할 수 없는 넘치는 영광을 바로 그분의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면 그와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가 친구면 집에 데리고 오고 싶어하고 그가 애인이면 부모님께 소개해 드리고 싶어하고 그리고 함께 살아가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정말 평생을 함께 살아가지 않습니까?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이유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면 그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에게 숨기는 것이 없습니다. 나의 은밀한 자랑도 나의 감추었던 능력도 나의 숨겨놓았던 모든 것을 다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것은 진정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또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하실 때에 그것은 완전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베풀어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와 평생 함께 하시기를 원하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기를 원하실 때에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과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려면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려면 그분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냥 종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냥 피조물로도 갈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원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주셔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자녀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더 나아가 우리를 가족으로 자녀로 삼아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그분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신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경시키기 위해서 모든 핍박과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셔야만 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있어야만 했습니다. 모든 핍박과 고난을 경험하셔야 했고 마지막에는 생명을 버리셔야만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세상의 자녀이자 사탄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모든 죄값에 대해서 사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더 큰 것일까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죄인에서 의인이 되는 것. 어떤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그 어떤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고통당하시는 것과 우리를 죄사하시고 의인을 만들기 위해서 죽으시는 것, 그 어떤 것도 더 쉽거나 더 할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이었던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죽으심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해 보았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서 고통당하시고 괴로움을 겪으시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더 어려운 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을 좀더 생각해 봅니다. 정말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 그 모든 고통을 당하신 것일까요? 진정으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것일까요?

마태복음 27장에서 20절부터 26절은 예수님의 고통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분명 십자가에서의 고통이 아닙니다. 하지만 더 가슴아프고 애절한 부분입니다. 이 괴로움은 본디오 빌라도와 예수님,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장면은 하나님의 자녀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자녀를 만든다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줍니다.
"20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 21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22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 주니라"

예수님은 지금 이 장면에서 대제사장들에게 잡혀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끌려 왔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에 죄수를 풀어주는 관습에 따라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제 공은 백성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결정은 백성들이 내릴 차례였습니다. 그 때 백성들은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당황한 빌라도가 재차 묻습니다.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래도 백성들은 소리지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는 무리의 거센 분노를 보았습니다. 그들에게서 만약 자기들 뜻대로 하지 않으면 소요를 일으키고 폭동을 일으킬 기세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기로 합니다. 이유는 백성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주님은 바로 그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바로 그들을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십니다. 로마에 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던 대제사장들에 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힘이나 권력이 없었습니다. 바로 사랑했던 그들, 자녀 삼고자 했던 그들, 구원하고자 했던 그들에게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더 괴로운 것은 바로 그들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이 먹이셨던 자들이라늘 점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배고픔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에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열두 광주리나 남아서 그것이 더욱 유명한 일화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병을 불쌍히 여기셔서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귀신들린 것을, 눈멀은 것을, 문둥병을, 앉은뱅이를, 죽은 것을 살려주셨습니다. 그 때 그들은 얼마나 기뻐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까?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에 '호산나'를 외치며 찬양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쳤습니다. 그들의 찬양을 받으시면서 주님은 예루살렘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바로 그들이 이제 주님을 죽이라고 외칩니다. 바로 예수님을 따르며 환호하고 기뻐하던 자들이 주님을 죽이라고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주님이 그렇게 구원하고자 하셨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순간 예수님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왜 내가 이런 자들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라고 회의가 들지 않으셨을까요? 왜 이런 자들을 나의 자녀로 삼아야 하는가 후회되지는 않으셨을까요? 그리고 모든 구원계획을 중단하고 그들을 자신의 죄로 죽게 하시고 지금 저지르고 있는 이 악한 일에 대해서 의인을 악하게 죽이려고 하는 이 모든 일에 대해서 천벌을 내리실 마음이 없으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리라는 것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악함과 완악함과 강퍅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자녀삼고자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죽기로 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그분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누군가 한 사람, 주님을 만류했습니다. '주님 그러지 마십시오. 주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한 사람, 주님을 잡는 군병들에 대해서 칼을 들며 저항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이 잡혀가시는 것을 막겠습니다. 주님, 피하십시오' 하지만 그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주님은 이일에 대해서 분명한 목표가 있으셨습니다. 칼을 들고 달려드는 군병들에 대해서도, 자신을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들에 대해서도 주님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의지가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이미 성경에 나온대로입니다. 그 성경은 바로 주님이 직접 쓰신 글입니다. 주님이 알려주셔서 작성된 구원계획에 관한 주님의 설명이었습니다. 이 구원계획은 아주 오래전에 세워진 것입니다. 이 세상이 생기기도 전에 주님을 붙잡는 군병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주님께 대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들이 생기기도 전에 이 민족이 나타나기도 전에 주님은 이미 구원하고자 하셨고 사랑하기로 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의지요 열심이자 목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변하시지 않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도 변하지 않고 주님의 열정도 변하지 않으며 주님의 목표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결코 인간들의 악함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고통을 감당하십니다. 사랑했던 자들로 받는 버림받음도, 아꼈던 제자들로부터 받는 실망감도, 기대했던 모든 일들이 무너지는 절망도 주님은 다 감당하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 배반한 자들을 그 돌아선 자들을, 그 불순종한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만드십니다. 다시 찾아오셔서 배반했던 베드로를 불러주십니다. 또 찾아오셔서 믿지 않는 도마에게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주님을 핍박하던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이방의 사도로 세워주십니다.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처음에는 불신했지만 처음에는 핍박했지만 그 크신 예수님의 사랑에 압도되어서 그들은 모두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거역할 수 없는 사랑에 오히려 감격하며 감사하여 그들은 둘도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통을 감수하시면서 또 다시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모습과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자녀 삼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충성하지 못했고 인내하지 못했던 우리들을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그분의 나라에 충성하기 위해서 그분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또 다시 버림받고 외면당하며 붙잡히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우리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그 모든 고통을 다시 당하십니다. 주님의 희생과 고통은 지금도 우리들을 대상으로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정말 괴로웠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신형교회의 청년부로서 우리가 정말 힘들었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작은 개척교회의 한 일원으로서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무엇을 피하고 무엇을 안하고 싶었을까요? 적은 수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 무엇이었나요?
그것은 아마 돈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돈때문에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고민이니까요. 그렇다면 그것은 불편함이었을까요? 몸이 힘든 것, 마음이 힘든 것?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교회와 비교할 때에 우리 교회에서 사역하는 것이 더 많은 시간을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힘든 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외 즐거움이 없는 것은 어떤가요? 보람이 없는 것, 결과가 없는 것, 흥이 나지 않는 것, 그것도 어쩌면 괴로운 일일 것입니다. 늘 작은 교회는 큰 교회보다도 더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더 큰 교회는 좀 더 재미가 있을텐데라는 환상이 있기도 하지요.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니 뭐라고 말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들은 모두 다 나를 기점으로 갖게되는 고민이자 괴로움일 것입니다. 이일에 대해서 저는 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돈을 줄 수도 없고 편안하게 해 줄 수도 없고 즐거움을 줄 수도 없으니까요. 그것을 완전히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밑빠진 독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이제 말하려고 하는 더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게될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혹은 어렵게 생각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까요? 은혜가 없다는 것이 가장 우리를 힘들게 만들지는 않았나요? 정말 정말 은혜를 받고 싶은데 그 은혜를 받지 못해서 괴로워하지는 않았나요? 우리가 진짜 원했던 것이 은혜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여기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은혜의 생명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대로 우리는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발견하는 은혜의 근원은 거부하는 자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합당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생명을 버리시는 예수님의 희생입니다.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들을 위해 필요한 구원계획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주님은 인간들을 너무 사랑하셨지만 인간들에게 의존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시지만 우리들에게 의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항상 주님을 실망시킬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일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우리도 사람들에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지 우리의 의존의 대상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에 의지해 버리면 우리는 그에 따라서 좌지우지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반응과 사람들의 대답과 사람들의 호응에 따라서 잘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하고 그만두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다 잃어버리게 만드는 행동입니다. 우리에게 채워져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고 그 희생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움직이는 그분의 자녀들이 되어갈 수 있습니다.

유초등부 교사로서 우리는 유초등부 아이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많이 오건 적게 오건 말을 듣던 듣지 않던 믿음을 갖고 있던 그렇지 않던 간에 우리는 아이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은혜에만 의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결같을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의존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중고등부 교사로서 우리는 중고등부 학생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학생들에게 휘둘려서는 안됩니다. 영향받아서도 안됩니다. 그들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지 우리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믿도록 의지하도록 돕는 사람들이지 그들로부터 위로를 얻고 소망을 얻고 행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만 위로를 얻습니다. 소망을 누립니다.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한 학생, 혹은 여러 학생들이 우리에게 주는 어떤 존재가치를 느끼려 함이 아닙니다.
청년부 회원으로서 우리는 청년부의 각 지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서로 사랑할 때만이 우리는 서로를 도와줄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서 사랑을 요구하면 할 수록 우리는 서로의 사랑을 깎아먹습니다.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상처입습니다.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받고자 할때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마음 상합니다. 그렇게 청년부에 상처받으면 부서활동은 끝이 나고 그냥 예배만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자기 방식대로 현격히 제한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도움을 받을 분은 한분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채우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부족한 모든 것이 다 채워집니다. 이 말은 청년부 활동과 관계 속에서 아무 것도 얻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도움도 받을 수 있고 위로와 격려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없어도 상관없어야 누릴 수 있지 그것이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전혀 누릴 수가 없게 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늘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버려두고 달아났던 제자들처럼 예수님께 돌아섰던 군중들처럼 사람들은 늘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누리고 채움을 얻고나서 긴급한 영적 갈급을 메우고 또 한숨 돌리게 되면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그 백성들을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다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다시 떠났던 베드로를 찾아가시는 것처럼, 다시 의심하던 도마를 방문하시는 것처럼, 다시 핍박하던 사울에게 나타나시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처럼 그렇게 완악하고 패역하며 불순종하고 외면했던 백성들에게로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아마 예수님은 지금도 필요하시다면 다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심판주의 모습은 아닙니다. 여전히 사울에게 나타나시던 모습과 같이 '왜 나를 핍박하느냐?'하면서 다가가실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에게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에게라도 나타내 보이시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부르고자 하시는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주님이 있는 곳에 있게 하시기를 원하고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주님의 모습을 따른다면 그 은혜가 우리 삶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충만하게 채워질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속에 거할 것입니다.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계속 삶속에 풍성하게 머물것입니다. 그것이 효과가 있건 없건 간에 우리의 새로운 반응에 그들이 호의를 보이던 보이지 않던 간에 그 은혜는 우리에게 머무를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 가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 모습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사람들에게 의존할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그들에게 나타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불편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예수님이 불충한 사람들의 모습에 분개하셨다면, 그런 분이셨다면 처음부터 우리에게도 나타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도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나 그들이나 혹은 그 어떤 자들이나 다 똑같은 죄인들인데 어떻게 그 은혜 없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긍휼히 여김을 받은 대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긴 대로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을 바꾸면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희생하면 놀라운 일이 생겨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으셨을 때에 일어난 일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0절에서 52절이 그 놀라운 일을 보여줍니다.
" 50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던 성도들을 일으켰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성소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다른 사람을 용납하면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나타내면 그래서 예수님을 닮으면 놀라운 일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자던 성도들을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의무가 아닙니다. 교사의 수칙이나 청년부의 원칙 같은 것도 아닙니다. 공동체 게임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나누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그렇게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지금도 베푸십니다. 이러한 은혜가 있다면 우리는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기쁠 것입니다. 즐거울 것입니다. 서로서로 편안할 것이고 유익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붙들고자 한다면 담임목사가 없는 교회는 오히려 사랑으로 넘쳐날 것입니다. 몇 사람 안되는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희생과 그 희생을 닮으려고 하는 신실한 사람들로 인해서 큰 변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가운데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7월에 맞이한 이 수련회 속에서 다음 2009년도 하반기를 바라봅니다. 여러가지 일이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올해 전반기에 있었던 일보다도 더 많은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항상 미래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일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새로운 일이 생길 때마다, 혹은 예상했던 일이 이루어질 때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특별히 예수님의 희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희생의 은혜가 얼마나 고귀한지 얼마나 값진지, 그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 영광에 동참하게 되었는지를 보십시오.

우리도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교사로서 순장으로서 유초등부와 중고등부, 그리고 청년부에 속해 있으면서 나이어린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모습을 봅니다. 또한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는 삶을 살아갈때에 우리의 교회 생활은 너무나 값지고 귀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온전히 의지하면 할 수록 우리들은 하나님과 친해질 것입니다. 그 때 이런 기도를 드렸고 그 때 이런 헌신을 했으며 그 때 이런 봉사와 충성을 하였지, 기억이 날 것입니다. 추억도 될 것입니다. 부디 그런 시간을 만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하나님이 만드시는 아름다운 삶을 누리십시오. 천국에 가더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천국의 삶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더욱 하반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져서 주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아름다운 일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자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신형교회 청년부가 예수님의 희생을 닮는 아름다운 청년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혜를 간절히 바랄 때 우리들의 삶 속에 풍성하게 내려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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