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발전] 48갈 4; 6-9 종으로 살 것인가 자녀로 살 것인가2Loading the player...
48갈 4; 6-9 종으로 살 것인가 자녀로 살 것인가2_5
2020. 4. 17. 금. 금요철야.
*개요: 갈라디아서 연구 [갈]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갈]4: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갈]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이단은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초대교회때에나 중세시대나 근현대 시대에서나 바로 지금 현재에도 이단은 항상 존재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갈라디아서에서도 이단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이러한 이단에 대한 경고와 권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나 구원파나 이초석, 박옥수, 이재록, 정명석 등등은 통일교나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와 같이 전부 정통에서 멀리 떨어진 이단 혹은 이교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단의 존재를 주목하면서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이단과 다른 정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이단에 대한 경계와 권면과 회복을 통해서 더욱 정통이 무엇인가가 잘 나타났습니다. 서기 4세기 초에 나타난 아리우스파의 존재는 이러한 점을 잘 나타내 줍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였는데 예수님이 반신의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 주장에 교회가 혼란이 있자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1세는 325년에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그리고 아리우스에 대항해서 아타나시우스가 삼위일체를 강력하고 증거함으로써 결국에는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이단이 나타나기 전에는 정통의 의미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다소 모호하게 존재했었지만 이단이 나타나면서 정통이 더욱 명확해지고 분명해지면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나타나는 복음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의 삶과 비교될 때 복음의 삶은 더욱 분명하게 증거됩니다. 그래서 복음 그 자체를 잘 정리해서 설명하는 로마서도 의미있지만 율법과 비교하면서 복음을 설명하는 갈라디아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정통만을 설명하는 것 보다는 이단과 비교해서 정통을 설명할 때 정통의 의미가 더욱 잘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따르는 진정한 신앙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4,5절을 보십시오.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갈]4: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근본적으로 정통에 있는 자들이 정통에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습니다. 단순히 하나님께 기웃거리면서 관계가 느슨한 자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녀가 되게 하셔서 하나님과 가족관계를 만들고 아주 친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셨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바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너무 높아지면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들이 그 아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을 것이었기 때문에 인간과 동일한 수준으로 낮아지신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친밀함과 같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의 명분을 갖는 것이 중요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통으로부터 멀어져서 이단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이단에 속한 자들의 생각으로 돌아가보면 그들이 더 좋아 보이고 이단이라고 해도 아무 상관없는 무리에 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온전히 자신이 누리는 유익과 욕구의 충족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형식적이지 않고 실제적이라는 것, 성경의 진리를 더 많이 배운다는 것, 강력한 체험과 응답이 있다는 것, 확실한 보상과 축복이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 자신이 얻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항상 기존 교회에서는 느슨한 하나님과의 관계와 불만 많은 교회생활 속에 있다가 이단의 유혹을 받았을 때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듯한 제안에 손쉽게 넘어가게 되어버립니다. 마치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에서 무리와 떨어진 들소, 사슴, 영양 등이 사자와 호랑이의 습격을 받아서 목숨을 잃는 것처럼 그렇게 이단에 빠지게 되어 버립니다. 그곳에서 열심히 일대일 성경공부를 하고 집회에 참석하고 예배를 드리고 선교를 한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결국 교주를 위해서 하는 것 뿐입니다. 그 자신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중에 잃어버리는 것은 자신의 삶 뿐입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그 가족들이 나와서 그를 다시 돌려달라고 하소연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셨는가 보십시오. "[마]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4: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귀의 유혹을 따라서 그를 경배하면 모든 것을 얻을 것 같아도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과 대치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귀를 심판하시고 또한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겨내는 방법은 그런 유혹을 물리치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해내는 사람들이 바로 정통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것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유익과 욕심의 충족을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 것이며 금하시는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단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 확신 속에 사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이 때문입니다. 자녀로서의 명분이 있기 때문에 그 확신 속에 거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자녀의 명분을 말하고 있는 이유는 이단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율법에서 복음으로 옮기게 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고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명한 사실과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할 때 이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율법에서 복음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점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갈]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사도 바울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 아들의 영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는 것이지 사도 바울이 우리보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다만 그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 우리는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로서 하나님의 주시는 유업을 받을 자들입니다. 천사도 흠모하는 하나님의 아들, 딸인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자녀보다 더 귀한 자녀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아들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자녀된 우리에게 더 좋은 분위기나 더 자세히 알게 되는 성경지식이나 경험이나 체험이나 상급이나 축복 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됨입니다. 그리고 자녀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분위기가 안좋아도 성경지식을 잘 몰라도 경험이나 체험이나 상급이나 축복이 없어도 오직 구원받음을 주시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선택을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높이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단에 비교되는 정통의 본질을 깨달을 때에 이것이 바로 복음으로 사는 삶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으로 사는 삶은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그것은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갈]4: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갈]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악한 자들과 우상에게 종 노릇하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그분을 알게 하시고 그분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녀로 살지 못하고 다시 종처럼 사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한탄함으로 안타까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율법의 삶이 바로 그런 종 노릇하는 삶입니다. 종은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말고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또한 자원해서 하는 마음이 아니라 억지로 하는 마음입니다. 그들에게 종 노릇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들에게 종 노릇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거나 하나님을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절에 부모님께 선물을 드린다면 그것은 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녀로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배우지 못하고 가르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율법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율법의 삶을 버리고 복음의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것이 진정한 정통이며 이단을 이겨내는 신앙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순한 성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갈라디아서를 통해 우리는 복음으로 사는 삶의 중요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러한 방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하겠습니다. 그 방향을 향해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서 더욱 그 은혜의 삶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종으로서의 부족함 만을 느끼다가 쓰러지지 말고 자녀로서의 풍성함을 누리면서 복음의 은혜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4생활설교 관련글[더보기]16설교소감 관련글[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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