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8:15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8: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8: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오늘 본문 말씀에서 나타난 사건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임재에 관한 모든 오해를 촉발하였고, 지금도 성도들에게
있어서 성령의 내리심에 대한 혼란스러움을 가져다 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성령론을 주장하였고, 그로 인해 많은 오류와 옳지않은 생각들을 서슴없이 펼쳤던 것입니다. 그 잘못된 오해란 세례받음과 성령받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대개
오순절 계통의 교파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본문 말씀에 근거해서 꽤 이러한 생각은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본문 사건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풀이됩니다.
“8: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8:15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사마리아의 성도들이란 빌립이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던 그 사마리아
성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은 자들을 뜻합니다. 빌립은 바로 그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을 그 성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 후에 빌립은 복음을 확증하는 많은 표적과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보았던 시몬도 이러한 빌립의 표적과 능력행함을 보고 놀라며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은 것은 성령의 함께
함은 아니었습니다. 다시말하면, 그 사마리아의 성도들에게
아직 부족한 것이 하나 있었다는 것입니다.그들에게는 복음이 전파되었고,
표적과 능력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받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일을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었고, 베드로와 요한은 보냄을 받아 그들을 위해 성령받기를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말씀을 근거해서 오순절교파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것봐라, 세례와 성령은 구분되고 있지 않느냐? 세례는 성령없이 받을 수있는 것이고, 나중에 따로 성령을 다시 받아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커다란 오해를 낳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에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 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런데, 어떻게
사마리아의 성도들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에 의하지 않고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례를 받았다면, 또 다시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를 통해 성령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이 모든 오해는 본문말씀에 나타나는 ‘성령받음’을 ‘성령의
임재’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였을 때에 비로소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 아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두 사도가 기도했을
때에 그제서야 성령이 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이 말씀 속에서 ‘성령받음’은 사실 ‘성령의
임재’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했을 때에 성령받음에 대해 오해하게 되었고, 세례를 받은 자는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시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그런 잘못된 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이러한 성령받음이 사실은 ‘성령충만’임을 깨달을 때에 모든 오해가 풀립니다. 잘못 알고 있었던 모든 문제들이
분명히 밝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으로서 본문 사건을 다시 한번 해석해 보면 이렇습니다.
빌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마리아 성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럴 때에 이미 성령님께서는 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역사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찾아오신 성령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들은 믿고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이어서 빌립은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세례를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고백을 시인하였고, 앞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이 옳고 진실하심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표적과 능력이 그들에게 밝히 드러나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를 더욱 굳게 잡았고,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크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마리아 성도들의 회심과 복음의 수용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게 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사도들은 그들에게 더 큰 은혜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한단계 나아간 은혜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그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들이 더욱 누릴 수 있는 은혜의 충만이었던 것입니다.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파송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지도자였던 베드로가 스스로 자원함으로 혹은 자신의 판단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교회가 보낸 것입니다. 더 큰 은혜를 끼치기 위해서, 자신들이
받았던 그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가장 신실한 베드로와 요한을 교회의 대표로 보내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들도
자신들이 받은 ‘오순절의 성령충만’을 그제서야 비로소 자신들에게
임한 성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그들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하기 전부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였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오순절 사건에 비로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고 말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시절에 그들이 말한
고백은 모두 거짓말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니면, 누구든지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수 없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을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틀리거나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충만을 분리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얼마나 주도적이며 세밀하게 사람들의 마음에 찾아오셨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찾아오셨던 그 성령의 충만하심이
사마리아 성에 파송되어 그들도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기를 기도했던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8: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8: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사마리아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모습은 오순절의
성령충만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고넬료의 집에 베드로가 찾아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임하셨던 성령의
충만함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의 위에 임하였습니다. 성령님의 뜨거운 믿음의 열정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들을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완전히 성령님께서 장악하셔서 신령하게 만드시고 영적으로 만드시고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케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하심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그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방언이라는
것은 참 신기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성령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이로써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이란 이러한 의미에서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령님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됨을 의미합니다. 혀를 움직이는
것은 이전에는 나 자신이었지만, 방언의 은사를 통해 그 혀를 움직이는 것은 내가 아니요 성령님이신 것을
깨닫습니다. 성령충만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성령님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이것은 비단 혀뿐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머리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성령님의 의지대로 움직입니다. 손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성령님의 의지대로 움직입니다. 팔을 움직입니다. 배를 움직입니다. 무릎을 움직입니다. 발을 움직입니다. 이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령충만이란 방언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왔던 삶이 아닌, 성령님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령충만한 삶이란 성령님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러한 성령충만을 통해 그들의 입을 열어 하나님의
일들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마리아 성도들도
그들이 성령의 충만을 입어 하나님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그들의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혹시 모든 생활을 내팽겨친채로 산으로, 들로, 이사람, 저사람에게로 쫓아다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오산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은 있는 자리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가 바뀌는 삶입니다. 그 삶은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스스로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봉사하며, 헌신하며, 섬기는 삶입니다. 이
새로운 삶이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성령님의 뜻대로 움직여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성령충만한 삶은 얼마나 복된 삶입니까? 얼마나 의미있는
삶입니다. 얼마나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는 삶입니까?
우리의 신앙생활도 어떤 면에서 사마리아 성도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단지 복음을 들었고, 그 복음을 받아 들였으며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였고, 고백하였고, 믿음을 가졌으며, 세례를 받았고, 하나님의 표적과 능력을 체험하였으며, 놀라운 신앙생활의 비밀을 발견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이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생의 확신이 되었고, 죽는 그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나가는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사마리아 성도들이 단지 빌립의 전도와 보인 하나님의 표적과 능력을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던 것과 같이, 우리는 더 큰 은혜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사실, 이러한
성령충만한 삶은 없어도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령을 받았고,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했으며, 분명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깨어뜨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도달하는 완전한 상태는 아닙니다.예루살렘 교회는 사마리아
성도들이 성령충만한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성도들이 성령충만한 삶을 살기를 더 원한 자는 예루살렘 교회나 베드로나 요한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더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를 들으시사 저들에게 안수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충만하게 해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제, 그 후로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하였는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의 의지대로 살았습니다. 성령충만한 삶을 통해서 그들의
삶 자체도 충만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삶을 그들은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감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삶을 원하십니다. 사마리아
성도들에게만 성령충만을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들에게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늘 기도하십시오. 성령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성령을 더욱 부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 삶은 방언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은 하나의 표시일 뿐이지,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지 않을 지라도 성령충만한 삶은 가능합니다.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성령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성령충만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하면서 성령충만한 삶을 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삶을 성령충만하게 만드십시오. 성령님이 내 속에 거하셔서 내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 되도록 나를 주장해 달라고
늘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단지
세례받고 신앙생활하는 단계가 아니라 성령충만하여 신앙생활하는 단계로 나아가서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