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기록되었으되 ㄱ)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1)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적은 규모의 교회에 다니는 최대의 장점은 가족같은 분위기와 서로가 서로를 다 알기 때문에 서로
걱정해주고 협력하고 사랑하는 분위기일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은 규모의 교회의 장점이 이런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합니다만, 실제로 개척교회에 다니다 보면, 그렇게 생각처럼 되지 않는
경우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개척교회임에도 불구하고, 대형교회보다도 더 분란이 있고, 서로를 의심함이 있고, 비난과 비판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교회들보다도 더 쉽게 교회가 깨어지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것은 교인 수나 교회의 규모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교회의 분위기를 지키고자 하는 성도들의 노력일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누구 혼자서 한 사람의 힘으로 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도 교회에서의 분란과 상호 비방을 막고,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서로 사랑하며 협력하는 관계를 갖게 하기 위해 일일이 인간관계에 대한 것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보고 있는
것은 교회 내에서 성도들 간에 있을 수 있는 시비와 다툼과 미움을 미리 방지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교회를 다시 한번 굳건히 세워나가기 위한
초석이 되는 말씀입니다. 가슴 뭉클한 은혜를 받기 보다는 머릿속에 깊이 담아두어야 하는 성경적인 지식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모든 다툼과 비방과 미움의 시작이 어디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10절 말씀입니다.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이 말씀은 판단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형제를 업신여기라는 말씀입니까?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판단도 하지 말고, 업신여기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말입니다.
그게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냥 무작정 판단하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데 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말고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까?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 대답이 됩니다.
“요8: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만약 다른 사람을 자신이 판단할 만하다면, 판단해도 좋을 것입니다.
업신여길 만 하다면, 그 정도로 자신은 대단하다면 그렇게 해도 좋을 것입니다. 죄가 없다면 돌로 간음한 여자를 쳐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도
부족함이 있고 그 부족함으로 인해 부끄러움이 있다면, 함부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에 대해 비판하거나 업신여기는 일이 금지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그 일을
하는 자를 다시 말해서 비판하거나 업신여기는 자를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나는 저사람과는 달라, 나는 더
경건하고 더 의롭고 더 믿음이 있어.’라는 생각은 교만하기 그지 없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 교만에 가득한 자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눅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주님은 이러한 기도를 받지 아니하시고, 겸손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교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우리로 하여금 교만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도저히 교만할래야 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의미가 우리에게 두려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14: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4: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주님이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지켜 보십니다. 주무시지 않습니다.
다른 곳을 쳐다 보시지 않습니다. 눈을 분명히 뜨고서 우리의 모든 일을 지켜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무릎이 주님께 꿇어지게 됩니다.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신의 일을 자백하게 됩니다. 마치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증거앞에서 죄인이 도저히 부인하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실토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눈앞에서 모든 것이 기록되고 저장되고 증거가 되었음을 깨달을 때에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했던 일을 자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숨겨진
것이 다 드러나게 되고, 그 드러남을 통해 자신의 추악한 모습과 죄악된 성격과 남들에게는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부끄러운 과거들이 낱낱이 공개될
때 어찌 무릎을 꿇지 않겠습니까? 무릎만 꿇겠습니까? 통곡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죄를 스스로 자백하게 됩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같이
이러한 자백의 순간이 바로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죄를 비탄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 죄때문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죄스러워서 말입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우리는 비판과 업신여김을 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판하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과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어떤 비판과 비난과 업신여김도 가지지 말라고 했다면, 전혀 죄를 지적하지도, 말하지도,
판단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고전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이 판단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죄이냐 악이냐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쁘고 좋고를 판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교회의 연합과 성도간의 교제를 막는 비판과
미움과 업신여김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과 용납하심으로 서로를 대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와 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신형교회가 모든 성도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주님의 귀한 교회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