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절제] 15스 1; 5-11 마음의 감동을 받은 자들2Loading the player...
15스 1; 5-11 마음의 감동을 받은 자들2_4
2020. 4. 8. 수. 수요예배.
*개요: 에스라 연구 [스]1: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스]1:6 그 사면 사람들이 은 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스]1:7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 [스]1:8 바사 왕 고레스가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그 그릇들을 꺼내어 세어서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니 [스]1:9 그 수는 금 접시가 서른 개요 은 접시가 천 개요 칼이 스물아홉 개요 [스]1:10 금 대접이 서른 개요 그보다 못한 은 대접이 사백열 개요 그밖의 그릇이 천 개이니 [스]1:11 금, 은 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에 세스바살이 그 그릇들을 다 가지고 갔더라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서 이스라엘 나라에 하나님의 전을 지으라고 했을 때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유를 얻고 포로에서 놓임을 받아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성전을 짓는 것이 아니었으면 도저히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자들이었지만, 성전을 짓게 된 것을 계기로 해서 그들은 자유를 찾고 다시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지 성전을 빌미로 해서 그들이 자유를 얻게 된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고 너무나 기뻐하였는데 그것이 단지 자유를 얻게 되었기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그것 만으로는 다음의 그들이 보였던 반응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반응을 보시기 바랍니다. "[스]1: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스]1:6 그 사면 사람들이 은 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그들이 은그릇과 황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과 보물을 즐거이 드렸고 그 외에도 예물을 아낌없이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이 구절에 포함되어 있는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라는 중요한 한 마디 표현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이 구절의 놀라운 감격이 다소 반감되어 나타나지만 원문에서는 그 뜻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그 뜻을 다시 한번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유다와 베냐민에 속한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일어났는데,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전을 세우기 위해 올라가라고 그들을 일깨우셨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일어나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감동하게 하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였고 그러한 감동케 하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분연히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을 이 말씀에 비추어서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은 왜 이곳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일어났습니까? 정과 욕심이 있었습니까? 은밀한 계획과 목적이 있었습니까? 인간적인 강권함과 피치 못할 압력이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마음을 감동케 하심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왜 작은 교회의 부족한 모습 속에 참여하게 되는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혹 다른 것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여기까지 올 수는 없습니다. 그런 다른 목적들은 여러가지 상황과 환경을 통해서 걸려져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어떤 이유와 목적이 있었을 지라도 시간이 흐르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사라지게 되고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여전히 이 일을 하고 있다면 그건 다른 목적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현재 우리의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는 데서부터 그 다음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케 하심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라면 그 다음 부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것을 드렸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마음이 감동됨을 알지 못한다면 이런 부분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될 것입니다. 혹은 바쳐 놓고도 스스로 왜 바쳤는지를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누가 협박한 것이 아니고 강권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스스로 즐거운 마음으로 드렸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투자한 것도 아니고 댓가를 바란 것도 아니고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동을 받아 즐거운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그게 순수했던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그릇을 드렸습니다. 어쩌면 값비싸고 고귀한 그릇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황금을 드렸습니다. 어쩌면 소중히 간직해 온 오래전부터 모아둔 황금을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감동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외의 다른 물건을 드립니다. 짐승도 드리고 보물도 드리고 늘 드리는 예물은 즐겁게 드렸습니다. 단지 예물만 드린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고 모든 노력과 봉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성도는 자신이 드린 예물을 어리석게 억지로 한 것으로 만들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때는 기쁨과 즐거움이었는데 나중에는 후회와 자책으로 만들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애초에 그 일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을 우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셨던 하나님의 성령을 욕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의 기쁨과 정성과 즐거움을 받으십니다. 그것이 겉으로는 물질과 예물과 수고와 봉사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포장일 뿐입니다. 내용물은 우리의 감사와 기쁨과 마음입니다. 포장을 벗긴 후에 막상 내용물을 보려 할 때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은 모든 예물과 봉사와 헌신을 드린 뒤에 후회하는 모습입니다. 이는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와 헌신과 예물이 있을 때에 하나님은 단지 그것만으로 일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드렸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드린 것으로만 일하시지 않고 고레스의 가진 것을 풀게 하셨습니다. 고레스가 자기의 것을 풀지 않았다면 성전 건축은 또 다른 난관에 부딪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은혜에 은혜를 더하사 바벨론이 이전에 예루살렘으로부터 빼앗아 간 것을 다시 다 돌려주게 만드셨습니다. “[스]1:8 바사 왕 고레스가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그 그릇들을 꺼내어 세어서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니 [스]1:9 그 수는 금 접시가 서른 개요 은 접시가 천 개요 칼이 스물아홉 개요 [스]1:10 금 대접이 서른 개요 그보다 못한 은 대접이 사백열 개요 그밖의 그릇이 천 개이니 [스]1:11 금, 은 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에 세스바살이 그 그릇들을 다 가지고 갔더라” 오병이어의 사건에서도 작은 아이의 한 끼 식사가 오 천명을 먹일 수 있었던 것은 나머지 모자란 부분을 주님이 책임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저 우리의 첫번째 헌신을 받으실 뿐입니다. 그것만으로는 모든 일을 진행시킬 수가 없습니다. 나머지를 공급해 주실 때에 늘 넉넉히 그리고 풍성히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주님의 이러한 은혜를 생각하며 늘 작은 것이지만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몸된 교회에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받으시고 우리의 삶을 축복해 주시고 더욱 교회를 부흥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삶 속에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4생활설교 관련글[더보기]16설교소감 관련글[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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