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4: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삼상]4:2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삼상]4: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삼상]4:4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쉽게 블레셋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사천명 정도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다시 진으로 돌아와서 승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논의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논의를 거듭하던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귀하게 여기던 언약궤를 가지고 나와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언약궤에는 묘한 힘이 있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나와서 싸우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삼상]4: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그들의 말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비록 여호와께서 우리를
패하게 하실 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패하게 하신 이가 여호와시면 이기게
하시는 이도 여호와실텐데 여호와 하나님께 이기게 해달라고 간구하거나 아니면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것'으로 '여호와'의 뜻을 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으로 우리를 구원하게 하자'라고 말하는 것들이 무엇일까요? 점을 친다든가, 부적을 지닌다거나, 학생들이 시험에 즈음하여 엿을 먹는다든지 찹살떡을
먹는다든지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동차 가운데에는 불교용품을 매달고 다니는 차량들이 있습니다. 연꽃을 매달기도 하고 염주를 매달기도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불교신자들은 그런 용품들이 부적의 효과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물건들에는 비신앙적인 물건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목걸이나 포켓 성경이나 성경암송구절
등등 신앙적 소품들이 그런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병사가 전쟁터에서 가슴에 총을 맞았는데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가슴에는 늘 지니고 있던 포켓성경이 있었습니다. 총알이 그 성경을 뚫지 못하는 바람에 그는 목숨을 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들려진 뒤로 너도 나도 성경을 가슴에 품고 다닌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일입니까? 성경을 읽지는 않고 단지 보호용으로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우리 기독교도 우상숭배로 빠지게 되면 이교도 못지 않게
더욱 악할 수 있습니다. 이미 로마 카톨릭이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성상이나 제단 혹은 소품들에 집착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과
성경의 인물들을 우상화하였고 그 우상을 당연한 듯이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사물이던 사람이던 그 어떤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오해가 불러일으킨 일들은 실소를 자아내게
하고 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이슬람교도들에게 빼앗긴 예루살렘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 십자군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십자가 군대라고 이름붙이고 그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승리를 위해 모든 복장에 십자가를 그려 넣기도 하고, 순결을
상징하는 소년들을 전쟁터에 데리고 가기도 하며, 성가를 연주하며 전투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의 결과는 비참한 패배였습니다.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악령을 쫓아내기 위해 십자가 모양을 사용합니다. 때로는 성경책도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악령은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모양이나 성경책 등으로 구원을 받고자 했던 사람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제 이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분명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지 않는데 어떻게 언약궤를 갖다 놓는 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패하게 하시는데 어떻게 십자가나 언약궤가 그들을 승리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그들의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데, 어떻게 한낱 십자가나 성경책이 모든 위험과 악령과 원수들에게서 그들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사탄을 쫓아내던 바울을 흉내내어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그의 말을 따라했습니다. 그리고
귀신들린 자를 물리치려고 했습니다.
"[행]19: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행]19: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행]19: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오히려 그들에게 달려들어 공격하니까 그들은 상처입고 옷이
찢겨져 벗은 몸으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권세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모양이나 하나님의 상징물 또는 하나님의 그 어떤 흔적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외의 다른 방법들에 구원을 요청하였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면한 어려움이 만약 하나님이 허락해서 임하는 어려움이라면 그 자체도 하나님 앞에서 견뎌내야만 하는 일들입니다. 다윗왕은 바로 이것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갈 때에 자기에게 욕을 하며 저주하던 시므이를 만났습니다. 그 시므이를 죽여버리자던 부하들을 만류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하]16:10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삼하]16: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
다윗은 겸비함으로 자신을 저주하는 시므이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물리치거나 피하기 위해 어떤 수단이나 방법에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호소하고 도와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수단이나 방법들에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안되는 것도 하나님 뜻이고 되게 만드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고 교만하거나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속에서 다시 한번 주관자되시는 하나님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을 되게도 하시고 안되게도 하시는 하나님께만 기도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