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1: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삼상]1: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삼상]1:3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삼상]1: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삼상]1: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삼상]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삼상]1:7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삼상]1:8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못할 때가 있고,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있습니까? 그때에
우리는 아무리 가지고 있는 것이 많고 풍성하여도 마음이 기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부족함을 느끼는 것일까요? 뭔가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나에게는 물질적
풍요가 있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었음에도 그 마음속에는 갈등과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받는 수난이며, 부끄러움이고, 괴로움이었습니다.
“[삼상]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그것은 아무리 남편 엘가나나 아무리 더 사랑해 주고, 물질적 필요를 채워준다하더라도 해결될 수 없는 고통이자 문제이고 갈급함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자식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엘가나는
한나를 정성스럽게 위로하며 말합니다.
“[삼상]1:8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
사실 이러한 말은 잘 귀에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아들이지 남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엘가나가
섭섭하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사실은 사실이었습니다. 엘가나보다 한나에게는 한 아들이 필요하였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한나의 마음을 아들 외의 다른 것으로 위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가나는 한나에게 ‘나로 인해 그 슬픔을 덜라’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열아들의 기쁨을 주겠노라’고 말하였습니다. 한나의 그 부족함에서 오는 고통을 엘가나는 대신해서
채워주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별 소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래도 한나는 여전히 자식을 얻게 되기를 간구하겠지만
엘가나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그렇게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엘가나의 위로에 촛점을 맞추어야 할까요? 얼른 한나의 기도장면으로 넘어가 그 기도가 응답받는
속시원한 결말로 나아가지 않고, 여기서 엘가나의 그 별 소용없는 것 같은 위로함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그 이유는 엘가나의 말 속에서 우리를 미혹하는 세상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너에게 너의 소원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너에게 너의 남편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너의 모든
목표보다 너의 그 모든 간절히 바라는 것보다 낫지 아니하냐?’라고 말하는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엘가나로 만족했다면 한나는 결코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고 적절히 타협하고자 한다면
우리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간절함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럴 때, 진정한 만족은 찾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으로인해 간절한 마음에 채워지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나는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갔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매어달리게 되었습니다.
시편17:14,15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17:14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시]17: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오직 주님의 형상으로 인해, 주님을 보게 됨을 인해, 주님께 간구할 수 있음에 대해서 진실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조건적인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함에서
오는 만족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한나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세상으로 만족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의지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사람이었나요? 시간적으로 한나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도 전에 그 얼굴의 수색을 거두었습니다.
“[삼상]1:17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삼상]1:18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그녀는 더이상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온전히 하나님으로만 만족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자식을 허락하셨습니다.
“[삼상]1:19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그 다음 20절, 그녀는 자식을 얻게 되었다.
“[삼상]1:20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각 절에는 최소한 하루 내지 열흘 그리고 1년의 시간차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나는 그 손에 자식이
들려지지 않았지만, 이미 하나님으로 만족하였다는 것입니다. 소원이
이루어져서 만족한 자가 아니라 소원이 이루게 될 것이라고 약속을 받아서 만족한 자가 아니라 그냥 주님께 간구함으로 인해 주의 형상으로 인해 만족한
자였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자에게 결코 아무것도 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입니다. 내게 소원이
이루어져서 만족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느냐의 차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직 먼저 하나님으로 만족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이 들어오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중심에 가장 첫번째로 두번째에 변두리에 오게 되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으로만 만족하게 되시길 바라십니다. 그곳에 우리의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그 믿음’에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속에서 바라시는 주님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