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1. 신학적인 의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믿음의 원리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이런 분들은 대개 진지하며 고상하고 성경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예 질문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은 가지고 있는 질문들에 대해서 해답을 얻는 일이 중요합니다. 만약 흡족한 대답을 얻는다면 더욱 주님의 일에
힘을 쏟는 열심있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의문점에 대해 대답을 얻지 못한다면, 신앙에 큰 회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실족하기도 하며, 교만해지기도 하고, 강퍅해지게도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올바른 대답을 얻는 것이 중요한데, 오늘
말씀은 그러한 대답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논쟁과 변론과 의문에 대한 답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답을 통해 우리는
모든 변론과 질문과 의문에 대한 가장 궁극적인 목표인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드러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2.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권능자이시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누군가가 질문하는 상황을 예상하여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강퍅하게 하셔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왜 그 악인을 처벌하십니까?, 과연 그 악인이
하나님의 뜻을 어긴 것이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 뿐인데, 왜 그 사람을 심판하십니까?’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대답할 때에, 왜 그 악인에 대해서
처벌하시는지, 어떻게 해서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질문하고 있는 사람을 꾸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가를 깨닫는 것이 진정한 해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대답은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토기장이에게
진흙 한 덩이로 마음대로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그의 권한인 것처럼,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와도 같으셔서 원하시는
대로 그릇을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치와 인간의 위치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시고, 인간은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토기장이와 같이 높아지시고, 인간은 그에
대해 아무런 항변이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말못하는 그릇과 같이 낮아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본질이십니다.
3.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 권능과 주권을 전해주고자
하신다.
이러한 본질적인 관계는 사랑과 순종의 관계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항변과 불순종, 그리고 비난과 대적의 관계에서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아버지로, 사랑하시는 주인으로,
공의로우신 재판장으로 우리와 가까와지시지만, 만약 우리가 거역하는 자로 돌변할 때에는 본래의 관계를 다시 일깨우십니다. 교만해지고 강퍅해진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을 다시금 일깨우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모습입니다. 완전한 주권과 섭리하심과 권한을 가지고 계시며,
그것에 대해 전혀 항변할 수 없는 엄위로우신 주권자이십니다. 토기장이와 그릇, 하나님과 인간인 우리는 바로 그러한 관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인간 자신이 만들어 놓은 산물과 비교할
때에 얼마나 하나님께서 사랑이 많으시며 인자하시고 스스로를 낮추시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즘 과학은 로봇을 만드는 데서 더욱 발전하여 드디어
인간복제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로봇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같은 인간을 만드는 데까지 도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왜 로봇이나 아니면 같은 인간을 만드는 줄 아십니까? 그 이유는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오직 자기 자신의 편의와 안전과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만들어놓은 산물에 대한 애정이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나 그 산물을 걱정하는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용할
뿐인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작업할 때 위험한 일을 당할 까봐 작업로봇을 만듭니다. 그리고 자기가 해야할 어려운 일을 대신해서 시키기 위해서 기계를 만듭니다. 그리고 자신이 입힐 수 있는 피해보다 더 큰
피해를 주기위해서 전쟁무기를 만들고 그 무기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실현합니다.
이러한 목적은 단지 기계나 로봇뿐만이 아닙니다. 이제 같은 인간을
복제를 통해서 만들고 있는데, 그 복제를 만드는 이유는 자신에게 필요한 장기를 공급받기 위해서이며, 자기가 못다 이룬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고, 궁극적으로는 로봇에서 만족할 수 없는 완전한 자기 욕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욕망의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미치지 못할
때에는 가차없이 폐기하거나 없애버립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자신의 뜻에 따른 그릇으로
만드시면서,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보이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진노의 그릇에 대해 보이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긍휼에 그릇에 대해서 보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인간이 스스로의 산물에 대해 보이는 것과 구별되는 놀라운 인자하심과 사랑하심입니까? 누가 피조물에
대해서 이렇게 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4.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식하고 의지하는 자들이
되자.
우리의 마음속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교만한 마음이 있다면, 이
말씀을 통해 그 주권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질문에 대한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의 권한에 대한 대답을 통해서 우리들은 진실로
우리는 토기장이의 의해 만들어진 그릇에 불과한 자들임을 깨닫습니다. 아담이래로 불의한 자들이 끊임없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바벨탑을 쌓으며, 자신들의 본분을 망각하였으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겸손히 그분의 주권앞에 머리를 숙이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영원토록 오직 찬송만을 받으시는 분이심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