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4: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4: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 율법과 은혜를 구별하지 못할 때 혼란이 일어난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 중의 하나는 율법과 은혜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은혜 또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은혜가 되고, 은혜가
율법이 되는 어려운 현상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말씀을 통해 은혜와 율법을 바르게 깨달음을 통해서 해소될 것입니다. 본문은 은혜와 율법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지난 본문의 내용과 계속되어 아브라함이 중요한 근거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가 믿음이 있음을 표시하는 의미로 인친 것이지,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믿음이 있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원리로, 세례는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표시일 뿐이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이는 마치 결혼식을 올렸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식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순서입니다. 무엇이
먼저이냐가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먼저였고, 할례는 그 나중이었습니다.
2. 율법과 은혜에 대한 혼란은 진정한 신앙생활을 저버리게
한다.
그렇다면, 너무나 당연한 이 원리가 왜 다시금 강조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할례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러운 순서로서의 할례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할례받았다는 것과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 한예가 오늘날의 할례로 여겨지는 세례에 관한 ‘진중세례식’입니다. 마치 호스로 물을 뿌리는 것과 같은 이와같은
세례로서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강압적이고도 집착적인 노력이 본 세례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율법에 고착하게 하며, 참다운 은혜의 풍성함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것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어떤 단계를 거쳐 그 믿음을 인치게 되는가입니다. 그럴 때, 믿음의 후배들은 자발적으로 그 은혜의 풍성함에 감사하게 되고, 자원하는 심령으로 율법의 의미를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을 때에 율법에 매여 은혜의 풍성함과 믿음의 참된 의미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은 온데간데 없고, 율법과
세례의 형식에만 치우치는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을 만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에 따라 율법을 이루기를 원하신다.
특별히 이 문제가 민감하게 대두되는 분야는 ‘후사’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후사라는 것은 기업을 물려받을 자를 뜻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후사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는 자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속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은 자기들만 하나님 나라의 후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처럼 되어야만 후사가 된다고 말합니다. 거기에서 문제가 시작되고, 오해가 일어나며,
거짓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기들만 옳다고 하는 데서 아집과 오류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후사가 되는 것은 율법에 속하여 할례를 받은 사람들만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다 지키며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어야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후사는 말씀을 지키는지,
세례를 받았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결정되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처럼 율법을 받기 전,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의 의로 말미암아 결정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후사가 되리라는 약속이 오직 값없이, 아무 공로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여기에는 그 어떠한 조건도 붙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조건없는
하나님의 약속은 율법에 속한 유대인들이나, 율법에 속하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이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은 율법에 속한
자인가 아니라, 믿음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16절에서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율법에 속한 유대인들의
조상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 속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조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구원의 도의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진정으로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신앙생활을
하자.
이제, 이러한 율법과 은혜의 의미를 깨달을 때에, 우리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율법과 은혜를 바르게 깨닫는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 말씀속에서 끊임없이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하나의 주장이 있는데, 그것은 ‘율법제일주의’입니다. 율법만 잘 지키면, 하나님의 나라의 후사가 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이요, 외식하는 자이고, 겉으로만 경건한 척하는 자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율법의 행함을 통해서, 말씀의 준수를 통해서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나만큼 하지 못하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저 사람처럼 하지 못하면 난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알지 못하는 오해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우리 자신의 초라한 경건의 댓가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그 은혜의 풍성함을 주장해야 하며,
그 값없는 은혜의 기쁨을 약화시킬 어떠한 생각도 배격해야만 합니다. 구원은 율법적 노력이나, 경건의 훈련이나, 개인의 열심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제 구원의 도가 어떤 것인지 아셨으니, 여러분 자신이 바르게
믿고, 주위 사람들에게 바르게 전파하고, 지금도 헛된 계명과 율법에 노예가 되어 괴롭게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풍성한 은혜를 깨닫도록 말씀을
전해줄 것이며, 혹시 이단이 다른 교훈으로 우리를 미혹하려 한다면, 단호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 구원의 능력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이러한 구원의 능력을 나타낼 때에 우리 모두가 은혜를 통해서 율법을 완성하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을 이루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