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5: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행]15:34 (없음)
[행]15: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교회에는
여러 직분자들이 있습니다. 목사, 강도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 구역장, 권찰 등등의 직분이 있습니다. 이러한 직분은 교회를 세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나름대로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 직분을 받기 전까지는 그 사람의 역할이 분명히
나타나지 않았지만, 직분을 받고 나면 그가 해야 할 일이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직분을 받은 자로 합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직분에의 충실성은 비단 교회에서만 나타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에서도 각 직분을 가진 자는 그
직분에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경찰은 경찰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교사는 교사다워야 합니다. 의사는 의사다워야 하고, 법조인은
법을 다루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만약 이 사회에서 각 사람이 그 직분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지 생각해 보십시오. 경찰이 경찰로서 살지 않을 때, 교사가
교사답지 않을 때, 의사가 의사답지 않을 때, 사회의 각
기능을 맡은 자들이 그 기능에 합당하게 살지 않을 때,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자신이 맡은 직분에 충실하고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자신의 맡은 역할이나
일에 충실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마치 근무중이지 않은 경찰과 같았습니다. 퇴근한 교사와 같았습니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의사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이 사람들은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받은 직분에 충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유다와 실라였습니다.
“[행]15: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유다와
실라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에 보내는 답장과 함께 파송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 내려갔고, 그곳에서 안디옥 교회에 전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답장을 전해 주었고, 단지 답장만 전해준 것이 아니라, 직접 사람을 보내 안디옥 교회를
격려하고자 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행]15:30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행]15: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단지 편지
한 통으로만 아니라, 외부사람들을 두 사람씩이나 만나고 그들의 위로와 격려를 받으면서 안디옥 교회에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유다와 실라의 역할은 끝이 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을 다 마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수고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편지와 예루살렘 교회의
위로와 격려만을 전달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끝났어도 되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행]15: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계속 머물면서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의
도를 설명함으로써 각 사람들을 굳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연약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더욱 굳건히 붙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 많은 말을 해주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 성도들의 경험들, 자신들의
체험담 등 여러 말로 할 수 있는 한 성도들을 굳건히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유다와 실라의 모습을 성경은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임무가 아니었지만, 이렇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수고하고 애썼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왜 이렇게 정성을 다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며 애쓰고 있을까요? 32절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행]15: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이것이
그 이유입니다. 너무나 당연합니까? 그들이 선지자이기때문에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은 그리 크게 놀랄 일도 아닌 것일까요?
이 말씀
속에서 성경말씀이 보여주는 순서가 어떤 것인지 주의깊게 살펴보십시오. 그들이 선지자라는 말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형제를 권면하고, 굳게 했다는 말이 뒤따릅니다. 이것은 선지자라는 그들의 직분이 그들로 하여금 직분에 맞게끔 행동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래서 권면하며 굳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 그들은 권면하거나 굳게 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미
바울과 바나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빨리
돌아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도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들 뿐만이 아닙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 남아서 하던 일은 다른 사람들도 그들과 연합하여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행]15: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바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라는 부분입니다. 유다와 실라는 돌아갔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이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이일을 해 나갔던 것입니다.
동일한
원리가 바로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직분을 맡고 있습니다. 그 직분은 모두 교회에서 교회에 유익이 되는 직분입니다. 하지만, 직분을 맡은 자로서 내게 맡겨진 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 처럼
별 것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일주일에 몇 번만 교회에 나옵니다. 그리고
나온 것도 몇 시간 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시간적으로 볼 때 잠깐 들리는 곳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 몇 시간 되지 않는 이 교회에서의 직분은 우리의 인생을
좌우합니다. 그 직분에 합당한 삶이 우리를 모든 시간동안 살아야 하는 삶입니다.
이제 각
사람에게 맡겨진 직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목사가 목사로서의 일이 몇 가지가 있겠습니까? 그 일만 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아무도 없는 곳, 혹은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크게 어려움이 없는 상황에서는 몸을 사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지자였기에 어느 곳에서든 성도들을 권면하고 굳게 하던
유다와 실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단지 주어진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직분에 합당하게 살려고 할 때에, 그 직분을 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 직분에 대한 충성스러움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스러움인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나타납니다.
“[출]17: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출]17: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그들이
연합할 때에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좋은 한 팀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교회에서
이러한 직분자이지만, 또한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모든 삶속에서 그러한 직분을 몸에 드러내며 살고 있습니다. 그 직분에 충실하게 살지 못할 때에, 그 개인이 욕을 먹을 뿐만
아니라, 그 직분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이름이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직분에
합당하게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직분을 주신 하나님께 충성스러움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 있든지, 그리고 어떤 일을 맡았든지, 혹은 맡지 않았든지 간에 직분에 최선을 다한다면, 성도를 권면하며
굳게하는 직분자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직분에 충성스러움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