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마] 40마 26; 31-35 죄책감이 없는 성도들2Loading the player...
40마26; 31-35 죄책감이 없는 성도들2_5
2019. 9. 13. 금. 금요철야.
*개요: 마태복음 연구, [마]26: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마]26: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마]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26: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26: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죄책감이 없는 범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연쇄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도 죄책감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도 죄를 짓지 않는데 성도들이 죄책감이 없으니 죄를 다시 짓습니다. 그렇게 짓는 죄는 중대범죄행위는 아닐 수 있지만 죄는 죄입니다. 사소하지만 역시 죄는 죄입니다. 죄책감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죄과’라는 죄를 짓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요? 오늘 성경말씀에서 나타난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 속에서 전형적인 ‘죄책감 없는 성도’를 발견합니다. 그는 죄에 대해서 당당하고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 그가 어떤 ‘죄과’를 저지르는가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죄에 대한 대비와 경계를 통해서 죄를 짓게 되더라도 그 죄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준비시키십니다. “[마]26: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주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죄성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무슨 죄를 지을지를 미리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연약함이 있고 죄성이 있고 지을 죄가 있다고 해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다 알고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이제도 그들에게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죄성 때문에 믿음의 연약함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는 못하겠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그들 힘으로 할 수 있는 죄를 이겨내는 삶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갈릴리에서 자신을 만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죄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큰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죄과이건 범죄이건 간에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결코 우리는 적절하게 죄를 지을 수가 없기 때문에 죄는 더 큰 죄를 낳고 그로 인해서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죄를 막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만 지은 죄에 대해서 죄사함을 받고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고 새롭고 깨끗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연약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정말 갈릴리에서 주님을 만날 수 밖에 없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 당당함과 자신만만함을 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는 자신이 결코 ‘죄과’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버린다는 것을 주님을 죽이는 것과 비교해보십시오. 주님을 버리는 것과 주님을 죽이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큰 죄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주님을 죽이는 것이 더 큰 죄로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도들에게는 주님을 버리는 것은 큰 죄입니다. 주님을 배신하고 떠나가는 것은 믿는 자들에게는 커다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자신 있게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자신의 죄책감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고 주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마]26: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주님이 말씀해주지 않았어도 그는 주님을 부인했을 것입니다. 다만 주님이 그의 죄를 이미 알고 말씀해주신 것은 그가 자신의 죄책감을 깨달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되기 위함입니다. 더이상 수제자 베드로라는 허울 속에 스스로를 감추지 말고 솔직히 자신이 부족하고 죄 많은 인간임을 고백하게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일어날 죄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앞으로 일어날 죄는 이미 일어난 죄 만큼이나 명확합니다. 베드로는 큰소리는 뻥뻥 쳤지만 한없이 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 그대로 그는 그날 밤 정확히 세 번 주님을 부인했고 마지막 세번째 주님을 부인했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맞다는 깨달았습니다. 비로소 자신이 연약한 죄인임을 깨닫고 슬퍼서 통곡했습니다. 그제서야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였습니다. 세 번이나 부인할 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했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큰 죄책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죄에 대해서 당당하던 베드로가 결국 죄를 지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어쩌면 측은해 보일 지 모릅니다. 남의 얘기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나 같으면 절대 그러지 않을 텐데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겨우 그런 것을 지키지 못하고 죄를 지었나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이 시대에서 베드로의 모습은 결코 남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도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와 주님의 제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어차피 주님을 부인할 제자들과 결심을 못 지키는 베드로에게, 그리고 그렇게 주님이 주신 것을 지켜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왜 이 말씀을 해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는 얼마나 그런 죄인들을 사랑하셨는가를 보이기 위함입니다. 얼마나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그런 우리들이 새롭게 변화되기를 원하시는가를 알려주십니다. 유사한 내용이 누가복음에 다시 나옵니다. 이번에는 주님이 이것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눅]22: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눅]22: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눅]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눅]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눅]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연약한 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시인도 못하는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항상 함께 있던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생활 33년 중에서 가장 의미있고 뜻깊고 함께 울고 함께 웃던 3년의 시간이 바로 그들과 함께 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을 높이 세워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연약함 때문에 그들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사탄은 그 약점을 이용해서 제자들 전체를 망가뜨리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사탄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연약함과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죄책감을 이용하여 그들을 파괴시켜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제자들 중에 그래도 베드로가 나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부탁합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누구보다도 더 크게 죄책감을 가지게 될 베드로는 다른 형제를 굳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부탁합니다.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바로 이렇게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죄를 짓기도 전에 그에게 죄책감에 대해서 알려주셨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가 다른 사람을 굳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냥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죄를 위해 예수님이 스스로를 버려 죄의 제물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바로 그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시며 죽으신 것처럼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죽으셨습니다. 이날 이때껏 주의 소명과 가정과 교회를 버리며 살아온 우리들을 위해 주님이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 희생을 깨닫는다면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주의 소명과 가정과 교회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버리지 말고 지켜야 하겠습니다.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시 버릴 테니까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비록 주님을 부인했지만 주님을 버렸지만 주님을 떠났지만 돌이켜 형제들을 굳게 하는 자들이 됩시다.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헛되게 되지 않도록 온전히 회개하여 도리어 더욱 열심히 주님을 시인하고 붙들고 따르는 자들이 됩시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소명을 지키고, 주님이 주신 가정을 지키고, 주님이 주신 교회를 지키는 자들이 됩시다. 그러한 삶 가운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크신 은혜와 기쁨과 평강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따라가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축복과 은혜가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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