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1: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21: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마]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마]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기도하는 자에게 가장 큰 위로는 반드시 응답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응답받지 못한다는 것은 가장 큰 절망입니다. 기도하는 자가 절망가운데서 기도한다면, 제대로 기도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소망가운데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리를 든든히 붙들어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기도응답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갖게 됩니다. 22절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마]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처럼, 우리 기도하는 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불러 일으켜 주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처럼 잘못 이해되는 말씀도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앞뒤 전후 사정을 생각지 않고 22절 한 절만 뽑아내서 사람들이 자기 생각대로 기도하는 일이 모두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이 말씀 이 한 구절에 나와 있는 그대로,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습니까? 이 방법이 정말 도깨비 방망이 같은 효력을 갖는 것일까요? 여러분의 신앙 생활의 경험 속에서 이런 일이 정말로 늘 항상 있어 왔습니까? 혹은 그렇지 않다면, 이 말씀은 그저 성경 속에만 나와 있는 말씀으로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말씀일까요? 기도 응답에 관하여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자로서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절대로 안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 구절을 잘 이해하기 위해, 앞 뒤를 살펴보도록 합니다. 앞에 있는 상황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성으로 들어가실 때에 길가에 서있는 무화과 나무에게서 열매를 얻으려고 다가갔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게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지금까지 열매를 맺지 못하였으니, 앞으로도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그러한 예수님의 권세에 대해서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여기서 ‘이 무화과 나무에게 된 이런 일’이란 무슨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에게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저주를 내리신 일입니다. 그 뜻은 예수님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에게 심판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앞으로도 주님께서는 열매 맺지 않는 나무나 사람에게 심판을 내리실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또한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무엇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이러한 권세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셨다는 것을 믿을 때에 무화과 나무에게 된 이런 심판의 일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고 하여도 된다는 것입니다. 나무에게 열매를 맺지 말라고 하는 것이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산더러 바다에 던져지라는 것도 역시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옮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것이며, 잘못된 일을 심판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다른 성경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입니다.
“[고전]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한다는 것이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무화과 나무에게 된 이런 일’입니다. 그러므로 22절에서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는 말씀은 성도로서 세상을 판단하고 선악을 판단하는 일에 관하여는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면 이룰 것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이라는 범주가 고작 성도로서 세상을 판단하는 일에 관한 일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아마 이런 말을 기대했을 지도 모릅니다.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지, 그것이 악이든 선이든 욕심이든 탐욕이든 간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한 것은 다 받으리라’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악 중에 구하는 모든 것을 다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칼을 달라 하고, 우리가 독을 달라 할 때, 아무리 그것을 믿고 구한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주시겠습니까? 애초에 욕심과 탐욕 중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면 받으리라는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우리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는 말에는 뭔가 빠진 말이 있습니다. 이제 이 말을 붙여 놓는다면, 이 말씀의 뜻이 우리 가운데에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은 ‘주안에서’라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우리 성도들에게 이제 중요한 것은 단지 믿음이 아니라, 아무리 허황된 일이라도 틀림없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내 뜻대로 구하는 것이 아닌 주님 뜻대로 구하는 마음으로 주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4:11을 보십시오.
“[요]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그 안에 있다는 것은 그 뜻과 마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과 마음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안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의 뜻과 마음대로 행동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마음대로 행동하십니다. 여기서 ‘무엇이든지 구하면’이라는 말을 밝히기 위해서 좀더 읽어봅니다.
“[요]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 맘대로 구하는 것을 다 이루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의 하인일 것입니다. 시종일 것입니다. 도깨비 방망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빛이 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을 따라 구하고, 그럴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믿고 구하는 것은 다 얻습니까? 못 얻습니까? 대답은 다 얻는다는 것입니다. 단, 조건은 주안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기도할 때,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내가 주안에 있는가? 주밖에 있는가? 내 욕심으로 기도하는가? 주님 뜻으로 기도하는가?그리고 내가 정말 주님의 능력을 믿으면서 기도하는가? 의심하면서 기도하는가? 스스로 물어보실 때에 반드시 주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그 기도에 하나님은 구하는 대로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런 응답을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