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4: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마]14:3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마]14:4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마]14: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마]14:6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마]14: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마]14:8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마]14:9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마]14:10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마]14:11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
[마]14: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우리가 삶 속에서 붙들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고 붙들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썩은 동아줄은 붙들지 말고 굵은 동아줄은 붙들어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붙들지 말아야 하는 썩은 동아줄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고 붙들어야 하는 굵은 동아줄은 하나님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헤롯은 헛된 맹세로 인해서 세례요한을 죽였습니다. 그는 원래 세례요한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감옥에 가두기는 했지만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알았기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헤롯이 어이없이 세례요한을 죽이게 됩니다. 그 일은 그 자신에게 돌이킬 수 없는 저주였습니다. 나중에 이 헤롯은 충이 먹어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왜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일까요? 그가 그렇게 죄를 저질렀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는 썩은 동아줄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세례 요한을 죽이고자 했던 사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헤롯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였습니다. 그녀는 세례요한을 미워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세례요한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원래 헤롯의 동생 빌립의 아내였는데 헤롯과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부끄러움을 세례 요한이 지적하고 정죄했기 때문에 그를 미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헤로디아는 자신의 딸을 시켜 헤롯에게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달라고 요청합니다. 헤롯은 그 요청을 거부할 수가 없어서 세례 요한을 죽이라고 했고 결국 세례 요한은 죽고 말았습니다. 끝끝내 그를 죽이고자 했던 헤로디아의 계획이 성공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로 인해서 세례 요한은 죽었던 것일까요? 이 일보다 먼저 앞서 있었던 헤롯의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실수는 죄를 부르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너무 의지하여 교만하고 성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이름을 걸고 이러한 약속을 했습니다.
"[마]14:6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마]14: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이러한 말도 안되는 약속으로 인해 스스로 올무에 걸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죄가 틈탔으며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어서 마침내 사탄이 기다리고 있던 대로 죄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야고보서에 나오는 말씀 그대로 였습니다.
"[약]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애초의 시작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로 헤롯이 자신의 이름을 과시하고 싶은 욕심에 이끌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 맹세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헤롯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애초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맹세는 했지만 세례 요한을 죽여달라는 요청은 들어줄 수 없다고 했어야 하겠지요. 아무리 큰 부끄러움을 당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보다 더 선행했어야 하는 모습은 아예 그러한 맹세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범죄를 부르는 맹세입니다.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그리고 해서는 안되는 일에 대한 약속은 스스로에게 올무를 거는 것이고 그 올무가 자신의 목을 매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들에게 충고하셨습니다.
"[마]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5: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마]5: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사탄이 우리의 말을 지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로 인해 조심을 하지 못하였다면 아무리 부끄러움을 당한다 하더라도 행동으로 인해 더 큰 죄로 나아가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할 것입니다. 말로 인해서 자신의 몸을 버리고 더 나아가 영혼까지 잃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원리 속에서 첫 번째 스스로를 자신했을 때에는 세 번 주님을 부인하였으나 두 번째 주님께 사랑을 고백할 때에는 온전히 주님만 의지했습니다. 그럴 때 그를 인도하는 모든 인도하심에 따라서 귀한 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굵은 동아줄을 붙드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오직 주안에서 평안하고 규모 있는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