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마] 40마 11; 7-12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2
40마 11; 7-12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2_5
2018. 12. 14. 금. 금요철야
*개요: 마태복음 연구 [마]11: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마]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마]11: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마]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마]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라고 질문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그 질문을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무리들에게 해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주는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그것은 항상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을 생각할 때 더 중요한 편을 선택해 나갈 수 있습니다. 먼저 주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마]11: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이 말씀은 너희들은 경치를 구경하려고 광야에 나갔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멋있는 갈대의 모습을 보기 위해 그렇게 기를 쓰고 광야에 나갔던 것이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회중들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고작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해 광야에 까지 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질문 속에서 우리는 첫 번째 선택으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세례요한인가, 갈대인가 입니다. 세례요한을 보러 광야로 나갔다가 갈대에 마음을 쏟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선택이 우리에게는 세례요한 보다 높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갈대와 같은 환경을 보는지에 대한 선택이 됩니다. 우리는 항상 환경을 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예수님이 묻습니다. “[마]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사람을 보려고 나갔느냐고 예수님은 물으셨습니다. 특히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러 간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회중들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광야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은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드러운 옷 입은 자들은 왕궁에나 있는 것입니다. 부드럽고 멋진 옷을 입은 사람을 보러 간 것이 아니라 바로 세례요한을 보러 간 것임을 주님은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 속에서 두 번째의 선택이 나타납니다. 바로 세례요한인가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인가 입니다. 세례 요한을 보러 갔다가 갈대에는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지만 세례요한이 입은 거친 옷을 보면서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고 그런 사람을 원했다면 광야에 올 것이 아니라 왕궁으로 갔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 아닌 세례 요한을 선택할 때 비로소 세례 요한을 바르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는 예수님인가 사람들인가의 선택이 됩니다. 이 선택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로 시선이 분산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하는 이유나 목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넘어서서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세 번째 선택은 예수님이냐 혹은 세례요한이냐 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마]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무리들은 선지자를 보려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이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말라기 3장 1절에 예언되어 있는 엘리야의 심령으로 주의 길을 예비할 자가 오리라고 예언된 바로 그 세례요한이었습니다. “[말]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세례요한은 단순한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을 소개하는 선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무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소개하는 세례요한도 특별했습니다. 그 이전에 선지자가 이렇게 주목받던 적은 없었지만 그는 그 어떤 선지자보다도 더욱 특별한 권능과 위엄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소개하는 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례요한보다도 더 뛰어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냐 세례요한이냐의 세 번째 선택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리 뛰어난 선지자라고 해도 단지 예수님을 소개하는 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아닌 예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많은 세례요한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더 뛰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세례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의심하고 혼란스러워했던 그는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보다도 작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예수님이 메시야, 그리스도심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 어떤 영적권위보다도 그보다 더 높으시고 영광스러우신 예수님을 더욱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니의 나라인 천국을 깨닫게 됩니다.
세례요한이 오면서부터 천국은 사람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천국복음을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례요한때부터 천국은 열리기 시작하였고 그 놀라운 천국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세례요한때부터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모든 천국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합니다. 천국은 그 문이 두드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두드리는 자는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천국을 침노하는 자가 천국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얻는 자들입니다. 그 엄중함을 알기 위해서 이 말씀을 영어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11:12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침노한다라는 말은 영어로는 ‘forcefully advancing’ 이었습니다. 이는 헬라어 로는 ‘biazo’라고 합니다. 이는 ‘손으로 과격하게,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것’입니다. 과격하게 문을 두드리는 것이 바로 침노한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을 애써 사모하고 두드리는 자에게는 빼앗을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빼앗는다’라는 말은 ‘harpazo’라는 말입니다. 이는 ‘갑작스럽게 열린다, 쟁취한다, 잡아채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천국을 열심히 두드리는 자는 갑작스럽게 그 문이 열리면서 원하던 천국을 그 두손으로 꽉 움켜쥐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어리석은 선택을 이겨내고 유혹을 극복하여 마침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비로소 천국을 움켜쥐기 위해 천국을 얻기 위해 침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천국을 침노하는 자들이었기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그럴 때 천국을 쟁취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천국을 침노하는 자들이고 천국을 소망하는 자들이며 천국에 들어가길 간절히 바라는 자들이라면 여러분은 그 옛날 무리들이 보기 위해 나왔던 세례요한보다도 더 크신, 아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우신 분을 보기 위하여 나아와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바로 그렇게 예수님을 찾기 위해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진실로 천국을 침노하는 자들로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오로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다른 우리의 생각을 흔들리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그의 영광의 광채로 인하여 빛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볼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 더욱 주님만 바라보고 그 영광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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