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마] 40마 2; 19-23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3Loading the player...
40마 2; 19-23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3_5
2018. 8. 10. 금. 금요철야.
*개요: 마태복음 연구 [마]2: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마]2: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마]2: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마]2: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마]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좀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인데 이 계획은 되어지는 모든 것을 다 고려해서 작정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계획을 넘어설 수 없으며 항상 그 계획을 이루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계획 속에는 매 순간 순간마다 우리가 갖는 연약함과 부족함까지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크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할 때에 혹시 우리의 잘못과 실수로 말미암아 그것이 파괴되며 실패하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 까지도 다 고려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우리 삶속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마]2: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마]2: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애굽에 살던 요셉과 마리아에게 천사는 현몽하여 헤롯이 죽었으니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예수와 마리아와 함께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는 헤롯의 아들이 그 뒤를 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대로 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헤롯 집안의 지속적인 감시나 추적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전에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가기 전에 원래 살고 있던 곳이 갈릴리 나사렛이란 곳임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행보는 약간 의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애굽으로 피신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가 되어서 돌아오는데 원래 사는 곳으로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곳으로 돌아오는데 왜 특별하게 요셉이 헤롯집안을 두려워하였고 유대로 가기를 주저하였으며 그래서 일부러 꿈에 지시하심을 다시 받아서 갈릴리 지방으로 오게 되었을까요? “[마]2: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마]2: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그들은 갈릴리 지방으로 지시하심을 받고 그곳 나사렛에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나사렛이란 곳이 어떠한 곳인지를 안다면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사렛은 그리 좋은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나사렛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후진적이고 저급한 동네였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도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느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곳에 요셉과 마리아는 되도록 가고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헤롯과 그의 영향력을 두려워했던 그들은 다시 어쩔 수 없이 나사렛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장소, 더 나은 장소, 더 발전된 모습으로 시작하고 싶었지만 그 자신의 두려움 때문에 원래의 모습 그대로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주님의 어린 시절은 요셉과 마리아의 두려움 때문에 비틀어져 보인 것 같습니다. 그분의 출생은 부모의 연약함으로 인해 망가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두려움과 연약함 때문에 항상 더 잘 될 수 있었던 모든 일들이 더 안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과연 정말 그럴 까요? 이 모든 일들이 우리의 연약함때문에 망가진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또 다른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은 나사렛으로 갔던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리 편한 삶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유로 우리는 편한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가장 불편한 삶은 주일날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일요일날 교회에 나가느니 차라리 예수님을 포기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까지만 하나님과 함께 할 뿐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더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흔들림없이 부지런하게 주일에 교회를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이전에 애굽으로 나아갔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지친 몸을 이끌고 나아갔습니다. 돈은 없었지만 다행히 동방박사들이 준 예물을 가지고 그 돈으로 애굽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던 삶은 그 자신에게 유익이 되었습니다. 바로 말씀하신 대로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려 했던 헤롯과 그의 군대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따라 주일날 교회에 온다면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사탄의 공격을 피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좀더 머무르면서 교제를 나누며 사역에 동참하며 더 많은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우리 속에서 더 커져가고 있는 예수를 방해하고자 하는 사탄의 유혹을 피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평일에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며 기도를 하며 말씀을 배운다면 그것은 우리 속에서 항상 동행하시고자 하는 예수님을 잊어버리게 하는 사탄의 시험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가 좀더 움직이면 움직일 수록 신앙의 수준과 연한과 열정에 따라 계속 그렇게 나아갈 수록 우리는 더욱 사탄을 이기고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을 굳게 붙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애굽에서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올 때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 까요? 여기에도 역시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요셉이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애굽으로 떠나가 머물렀던 것은 바로 요셉과 마리아를 위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요셉과 마리아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요셉과 마리아는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순종은 그들 자신의 생명과 성장에 커다란 유익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삭개오는 자신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약속했습니다.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그는 엄청난 손해를 본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는 엄청난 유익을 얻었습니다. 바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눅]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렇게 구원을 얻게 되었고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로 인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눅]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인자의 목적과 의미가 바로 삭개오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에 나오기 귀찮아 한다면 그래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면 교회는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교회가 타격을 입지만 이차적으로는 교회에 나오지 않는 본인들에게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뜻에 따라 모이기에 힘쓰고 서로 떡을 떼며 교제를 나누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 중요한 일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서 우리가 교회로 모이게 하십니다. 불편하고 힘들어도 그렇게 하도록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빨리 집에 가지 않게 하십니다. 누군가가 남아 있어서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계속 예배를 드리며 교제를 하고 성경공부를 하며 밥을 먹고 이런 저런 일을 하며 교회에 불이 켜져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이러한 인도하심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이러한 인도하심의 진정한 목표가 성경에 나와있습니다. 23절입니다. “[마]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이것은 주님이 친히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목표입니다. 이것이 사실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애굽으로 요셉과 마리아를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과연 이 목적은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요? 얼마나 중요하길래 바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을 인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이 의미가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은 가장 겸손하게 나타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11장 1절에 나온대로 주님은 다윗보다 더욱 이름없던 이새의 자손으로 나타나신 분이시고 뿌리에서 나타나는 가지처럼 그게 주목받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그만큼 자신을 낮추시고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내려오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처럼 연약한 인간을 위해서 자신을 낮추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긍휼이 많으신 분으로서 연약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순종함으로 가야합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를 통해 도움을 받는 믿음의 성도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도 우리는 움직여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도하실 때 그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 사역을 위해서 일하시며 이를 위해서 세미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이루십니다. 이러한 인도하심을 깨닫고 인도하심을 믿고 따라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두려워하지 말고 온전히 순종하며 따르기를 축원합니다. 바로 이러한 인도하심에 민감해지고 온전하게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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