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1:22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요즈음에는 많이 듣기가 어렵습니다.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경외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회의가 일어나고 있는 시대이기에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어른에 대한 공경심도 없고 권위에 대한 도전을 개혁이요 변화요 발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뭔가 다 부정하고 저항하며 맞서 싸워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더 무엇인가를 경외한다는 것은 힘든
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세대의 풍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우리들도 가장 권위의 근원되시며
영원토록 경외해야 할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한 경외를 드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생각도 없고 하나님이 두려워서 무슨 일을 못한다는 마음도 없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겠다는 마음도 역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마음 자세는 사실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포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도
소원해지며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은혜도 적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분명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데 죄로 타락한 인간들은 그 원인을 꼭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하나님이 뭔가를 잘못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하고,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돌이키려고 하지 않습니다.이러한
이유로 신앙에서 실족한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유는 거의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 속에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자신이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는
하는 데까지 해보았지만 먼저 하나님이 그렇게 나오시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나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화로우심을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은 실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내 자신이 그런 실의에 빠져있지는 않은지,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지는 않은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잘못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 자신에게, 그리고 실족하거나 절망해 있는 그 사람에게 있는 잘못을
알아야 합니다. 그 잘못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우리의 삶에 대봅니다. 길이를 잴 때 자를 대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에 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지 아니면 너무 긴지, 아니면 너무 짧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이 되는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이들은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와 부아입니다. 이들은 애굽왕의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은 매우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1:15 애굽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1:16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이 산파들은 바로왕의 엄중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히브리 남자아기들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애굽왕이 화가 나서 그들을 불렀습니다. 왜
명령을 따르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않고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은 산파 자신의 노력이었습니다.
임산부가 해산하기 전에 도착하지 않도록 애를 쓰고 미리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치며 그 다음에 도착해서 나머지 일을 처리하는 식의
의도적인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이
생명을 중시 여겨서가 아닙니다. 바로왕을 업신여겨서도 아닙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함으로 두려워해야 할 자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이일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때로는 생명의 위협도 있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이 바로왕의 명령을 어기게 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래도 바로왕이 시킨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다른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너무도 분명하게 그들은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하였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행동을 결정지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을 때,
그들은 무엇을 두려워 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에게서 받을 벌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벌을
더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과 마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은 자신이 하루 세번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져서 사자밥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라 바벨론 나라인 메데와 바사에서 다리오왕의
신임을 받는 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스라엘에 있다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습니다. 그를 시기하고 질투해서 행하여지는 모든 두려움과 위협속에서 그는 더 두려워할 대상인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단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사자보다, 다리오왕보다 하나님을 더 경외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이것이 정상적인 성도들의 생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생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실족한 사람들의
생각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문제의 시작을 발견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함으로 인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그냥 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싫어하는 일들을 하지 않은 자들을 모든 어려움과 희생을 무릅쓰며 그렇게 애썼던 자들을 도우십니다. 21절 말씀에서 그 이후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가가 나타납니다.
"1:21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
하나님을 경외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집을 왕성케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어떠한 축복을 받는지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올바른 신앙으로 다시 한번 새로워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