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을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나아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십니까?"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존재가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백성중에 나타나서 이적을 행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며 천국을 전파하는 예수님이 이상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들은 권세란 교육받은 정도와 소속된 문파가 어느 것이냐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제사장의 교육을 받은 데서 나오고 바리새인은 바리새파의 교육을 받은 데서 나오고 장로들이라면 나이와 경험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중 어느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런 권세를 가진 자들보다 훨씬 더 큰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목사는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음으로써 권세를 받습니다. 장로는 교회에서의 장로안수와 허락을 통해 권세를 받습니다. 권사, 집사 역시 이러한 원리를 따릅니다. 즉 모든 직분은 보냄을 받은 자의 권세를 부여받게 됩니다. 가지고 있는 권세가 크면 클수록 그 권세를 부여해 준 곳은 더 큰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청에서 권세를 받아가지고 나온 공무원과 청와대에서 권세를 받아가지고 나온 비서관의 위치는 다릅니다. 구청의 권세는 구청장에게서 나오지만 청와대의 권세는 대통령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의 대사관과 미국의 대사관의 권세는 다릅니다. 한국 대사의 권세는 한국 대통령에게서 나오지만 미국 대사의 권세는 미국 대통령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보냄을 받은 자의 권세는 보낸 자의 권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는 자의 일을 하기 때문에 그 일에 필요한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대제사장들 사이에서 왜 이런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 문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순종을 해야 할 것이냐 순종하지 않을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순종해야 할 것이냐 그렇지 말 것이냐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 예수님을 존중할 것이냐 안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문제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문제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권세의 의미를 올바로 파악할 때에 우리에게 권세를 가지고 다가오는 자들에게 순종해야 할 것이냐 순종하지 아니할 것이냐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에게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 장로님에게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강도사님에게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 전도사님에게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남편에게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 부모에게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 직장 상사에게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 세상의 관리에게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모든 문제가 권세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만약 권세를 인정한다면 순종할 것이고 그것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뒤에 계신 보내신 자에게도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요즈음 공권력이 날로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싸움을 말리던 경찰이 취객에게 폭행을 당하는가 하면, 음주단속을 하는 경찰을 위협하기도 하고, 데모를 막는 전경들에 거세게 저항하며, 여러 종류의 단속 공무원에게 반발하며 거부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행위들은 공무집행방해죄로 입건되어 그에 상응한 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벌이 큰 이유는 단지 경찰이나 전경이나 공무원 한 사람에게 위해를 가한 것이 아니라 나라의 공권력 전체에 그리고 통수권자에 대한 도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권력은 한 개인을 대상으로 하여 중한 형벌을 내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구에게서 권세를 받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에게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누가 그 권세를 주었는지를 물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조금 이상해 보입니다. 그들은 정말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알면서도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아니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속마음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21: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1: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1:26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1:27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그들은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러기도 저러기도 싫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하늘로서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부인함으로서 백성들의 지탄을 받게 되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러니 모른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고 대답한 것이지요.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질문하였지만 사실 스스로 답을 갖고 있음을 시인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지 않았고 그 권세를 인정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지만 예수님께 순종한다든지 그분께 고개를 숙인다든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도 거부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은 거부해도 하나님께는 순종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것은 마치 경찰관에게는 반항해도 공권력에 대항한 것은 아니라는 식입니다. 어떤 국가에서 파견한 대사에게는 온갖 모욕을 다 주어도 그 국가를 모욕한 것은 아니라는 식입니다. 한마디로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거부하면서 어찌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를 능멸하면서 어찌 하나님은 존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권세를 세우셨습니다. 국가, 정부, 위정자들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가정에는 부모님을 세우셨습니다. 교회에는 목회자를 세우셨습니다. 일터에서는 사장을 세우셨습니다. 이 모든 권세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우리는 그 세우신 자를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을 인정하는 셈입니다. 그 보내신 자에게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그 근원에 대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주신 권세자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하나님을 믿는 자로써 맡은 자리에서 그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순종하며 헌신하고 열심히 섬기는 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