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발전] 40마 22; 23-33 부활이 없다는 자들의 오해2Loading the player...
40마 22; 23-33 부활이 없다는 자들의 오해2_5
2019. 7. 19. 금. 금요철야.
*개요: 마태복음 연구 [마]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마]22: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마]22: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마]22: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마]22: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마]22: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마]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22: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마]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22: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오늘 성경말씀에서는 부활을 오해하던 사두개인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 모습은 어쩌면 부활을 오해하는 현대의 많은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의 근원은 근본적으로 부활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 오해의 시작은 23절에서 시작됩니다. "[마]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특별히 여기서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해서 묻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역사적으로 BC 2세기부터 AD 70년 까지 존재했던 유대의 한 종파였습니다. 사두개라는 이름은 다윗시대 제사장이었던 '사독'에게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을 중시하고 유대 귀족가문과 함께 성전을 관할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그와 연결된 친인척들이 모두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헤롯왕권이나 로마의 집정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지배계층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백성들에게서는 별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들은 부활, 심판, 천사 등에 대해서 불신하였고 메시야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물질적 실리주의자들로서 현실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하였기에 하나님의 간섭과 다스리심을 인간의 삶속에서 배제하였고 자기 자신의 능력을 살아가는 삶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세상에서 누리는 권력과 위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악한 짓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그들은 현대의 불신자들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더욱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믿기에 더욱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두개인들이 자신들의 부활을 믿지 않음을 더욱 합리화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찾아와서 나름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해서 물었습니다. "[마]22: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구약의 율법에는 대가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남편이 되어서 대를 잇게 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현세에서 대가 끊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두개인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법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마]22: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마]22: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마]22: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마]22: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칠 형제가 전부 한 여자와 결혼하게 되는 이러한 극단적인 경우는 실제 존재하는 사례라기 보다는 부활의 불합리성을 보이기 위해서 사두개인들이 만들어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다 실제적인 것은 칠 형제보다는 두 형제나 세 형제가 한 여자와 결혼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과연 부활 때에는 어떻게 될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이혼이나 재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현세에서 이혼을 했을 때 부활후에 다시 결혼상태가 되어야 하는가, 재혼했을 때에는 첫 번째 부인과 살아야 하는가 두 번째 부인과 살아야 하는가 등이 이와 유사한 질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생각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수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현세에서 다투고 싸워서 절교한 사람인데 부활 후에 그 사람을 다시 만나야 하는가, 나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그 사람을 다시 봐야 하는가 등등이 어려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주로 만나고 싶었다거나 만나서 좋은 사람이라기 보다는 만나기 싫은데 만나게 되는 경우가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단지 인간관계 문제 뿐이겠습니까? 부활하면 다시 학교를 다녀야 하는가, 부활하면 다시 군대를 가야 하는가, 부활하면 다시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가, 부활하면 다시 애를 낳아야 하는가, 부활해서도 이세상에서 하던 일을 다시 해야 하는가 라고 생각한다면 부활에 대해서 그리 좋게 생각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부활에 대해서 실망하고 낙심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활하지 않고 그냥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되기를 바라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지배층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부활이 있고 심판이 있고 천사가 있다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미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부활을 믿지 않은 이유는 바로 부활 이후의 삶이 그들이 원하는 미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논리를 잘 따라가보면 믿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러한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대답이 나타났습니다. "[마]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예수님은 그들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장가와 시집은 세상에서의 풍습이었는데 부활 때에는 그것이 다 사라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장가가거나 시집갈 필요가 없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말이 더 충격적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천사와 같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천사는 바로 사두개인들이 부정하던 바로 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존재처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을 부정하고 천사를 부인하던 사두개인들은 사실 부활 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을 부인하고 천사를 부인하던 그들이 부활을 얻게 되고 천사와 같게 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부활과 심판과 천사를 부인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가장 앞장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고 그리고 그 이후에도 결코 회개하지 않고 끝끝내 그러한 오해 속에서 살아간다면 죽어서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을 자기 나름대로 상상하고 그 결과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부활을 거부할 때 그것은 결국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부활에 대한 오해 속에는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불순종이 들어가 있습니다. 부활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과거 살아있을 때처럼 인간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세계가 아닙니다. 사실 이 세계도 우리가 만든 세계가 아니지만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통치가 사라지고 인간의 헛된 욕심이 채워졌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그러한 죄악을 용납하셨지만 부활 후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부활을 바라볼 때에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다스리심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부활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마]22: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마]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실 때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었지만 하나님께는 그들은 죽은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 속에서 살아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죽었으나 부활한 그들과 하나님은 교통하시며 교제하셨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들은 죽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로 존재하면서 하나님과 소통하였습니다. 부활을 논할 때에 그것은 부활 이후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삶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논할 수가 없습니다. 부활은 오직 그 가능함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그 가능함을 말하는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부활의 가능성과 하나님의 능력이 보여주는 불가능하심이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부활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부활을 자신만의 생각으로 부정하거나 자기만의 환상으로 인해 거부함으로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부활하면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인간의 환상이 우리를 부활에 이르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부활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만이 우리를 부활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사람들은 놀라워했습니다. "[마]22: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주님은 부활에 대한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단지 놀라면서 예수님을 거부할 것인지 아니면 놀라면서 예수님을 따를지가 우리의 선택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따르면서 부활을 사모하고 그 부활에 이르게 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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