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르다는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으로 예수님께 대해서 훌륭한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첫주 철야로 함께 모였습니다. 우리가 늘 주님께 모여서 기도를 할 때에는 항상 어떤 기대감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주시리라는 기대감, 어떤 길로 인도하시리라는 기대감, 어떤 삶을 살게 하시리라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항상 놀라운 일은 기도하고 난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기도하고 난 다음에 길이 열리고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우리는 이것을 기대해야만 합니다.
마르다도 역시 그러한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녀는 그러한 기대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마르다에게 왔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좀더 일찍 오셨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늦게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예수님께 대해서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하나님께 구하실 수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너무 늦게 왔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가장 정확한 때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와야 하는 때는 바로 그때였던 것입니다. 마르다는 이것을 모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예수님께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2. 그러나 그녀는 그 믿음대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역할만 하였습니다.
그러한 그녀에게 예수님은 이제 앞으로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오라비가 다시 사는 것입니다.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그런데 마르다는 이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장의 부활을 말씀하신 것이었지만 마르다는 나중의 부활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의 부활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기대감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마르다는 계속되는 예수님의 대화에도 여전히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셔도 마르다는 여전히 그 부활은 미래의 부활이지 현재의 부활은 아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연약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부활을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나중의 부활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장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나중에 일어날 일로 미루어버립니다. 주님은 재촉하시지만 우리는 믿음의 행동을 나중으로 연기해 버립니다.
3. 예수님은 우리 자신이 믿음의 삶을 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기만 하려고 한다면 그 말로만 맞이하는 장소에 머물러 계십니다.
그결과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마르다는 형제 마리아를 불러서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뿐이었습니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그리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마땅히 예수님을 모셔들여서 믿음의 행동을 했어야 하는 마르다는 그저 예수님을 자신이 만났던 곳에 서 계시게 만들고 있습니다.
“30 예수님은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니라”
이 안타까운 모습을 다시금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마르다는 부활을 미래로 생각했기 때문에 현재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녀는 말뿐이었습니다. 그 말은 놀라운 말이기는 하였지만 예수님을 자신의 삶으로 모셔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냥 마르다가 맞이한 그 장소에 그대로 계실 뿐이었습니다. 마르다의 믿음의 행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만난 그 장소에 그대로 모셔놓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의 행동을 통해 움직이게 되기를 원하시는데 주님을 모셔 들여서 뭔가가 일어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주님을 그곳에 그대로 놔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의 신앙이 조금도 자라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의 신앙은 자라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냥 그 곳에 있을 뿐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만약 주님을 모시고 들어왔다면 조금 더 주님과 함께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문제로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자주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그곳에 놔두고 오기 때문에 그리고 시간이 되면 다시 만나러 가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라고 전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에 주님과의 관계는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장소로 모셔들이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드림으로써 믿음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모셔 들인다는 것은 주님께 더욱 의지해서 주님께 더 많이 기도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집에서, 직장에서, 교통편에서 기도를 하며 그 속으로 하나님을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은 결코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각할 때에만 존재하고 그럴 때에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새로 개척 전도를 한 리빙스톤이 읽은 유명한 성경 귀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마지막 19절 20절이었습니다.
리빙스톤이 이 성경을 읽을 때에 이런 생각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제일 진실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거짓말할 수 없어. 예수님은 글자 그대로 신사야. 세상의 다른 사람은 다 거짓말하되 예수님께서는 거짓말 할 수 없어. 그런 까닭에 나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겠다. 내가 아프리카에 가면 주님께서 나와 같이 계실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 확신 가운데서 담대히 고국을 등지고 암흑의 대륙에 가서 일생을 거의 외로운 가운데서 고독한 생활을 했읍니다. 하지만 그속에서 예수님은 그와 동행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시고 삶으로 들어가면 주님은 그럴 때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어느 순간 마르다로 하여금 나사로의 무덤에 있던 돌을 옮겨놓게 하시고 그것으로 놀라운 부활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삶에 예수님을 모시고 삶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을 삶속에 모셔들여야 하겠습니다. 모든 순간 순간에 예수님을 생각하며 예수님께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할 까요, 주님, 하고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아무 계획이 없으실까요? 예수님이 아무 방법이 없으실까요? 예수님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묻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함께 기도하면서 그 인도하심을 받읍시다. 그럴 때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이끄시며 모든 힘든 상황을 변화시키시며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를 바라보며 함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