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8:24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광야로 추격하던
모든 아이 주민을 들에서 죽이되 그들을 다 칼날에 엎드러지게 하여 진멸하기를 마치고 온 이스라엘이 아이로 돌아와서 칼날로 죽이매
[수]8:25 그 날에 엎드러진 아이 사람들은
남녀가 모두 만 이천 명이라
[수]8:26 아이 주민들을 진멸하여 바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
[수]8:27 오직 그 성읍의 가축과 노략한
것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탈취하였더라
[수]8:28 이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라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황폐하였으며
[수]8:29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 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 질 때에 명령하여 그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이성 싸움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싸움에서 완전한 학살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렇게 거주민을 몰살하는 전쟁을 헤렘전쟁이라고 하는데 가나안에서의 전쟁중 여호수아는 두 번째의 헤렘전쟁을 치렀던
것입니다.
“[수]8:25 그 날에 엎드러진 아이 사람들은
남녀가 모두 만 이천 명이라
[수]8:26 아이 주민들을 진멸하여 바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
[수]8:27 오직 그 성읍의 가축과 노략한
것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탈취하였더라”
여기서 우리는 고민스러운 점을 발견합니다. 너무나 잔혹하고 무자비한 전쟁인 헤렘전쟁을 꼭 해야만 했던 것일까요? 왜
사람들을 다 살려두거나 혹은 보기에 괜찮은 사람들을 살려두면 안되었을까요? 왜 모든 남녀노소를 다 모조리
죽여야만 했을까요?
이 문제를 저는 사회적이나 문화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상담적으로만 접근해보려고 합니다. 이와 유사한 동정과 여유, 그리고 이긴 자의 자비와 배려의 마음과 그로부터 나오는 갈등을 우리 삶 속에서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어떤 일을 하다가 어느 정도 되었다 싶을 때 속도를
늦춥니다. 그리고 무리하게 강행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승자로서의 여유를 보여주는 것이 좋다고도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속도를 줄여버립니다. 그리고는 정지합니다. 적절히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에는 번번이 중단하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은 마치 아이성에
대해서 자비와 여유를 가지고 싸우려고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 혹은 어떤 사람을 살려두면서 전쟁을 치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패배가 찾아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지 않고 대충 하려는 마음에 결국 쓰라린 패배를
맛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실패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후회하게 되는 결정적인 근원입니다.
사실 여호수아의 삶속에도 이러한 실패가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이전 아이성의 싸움에서 여호수아는 모든 병력을 다 데려가지 않았고 그저 몇 만의 군사로 아이성을 제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는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온 힘을 다해서 아이성을 이기려고 했을 때에서야 비로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수]8:28 이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라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황폐하였으며
[수]8:29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 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 질 때에 명령하여 그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
그들은 죽기 살기로 노력했을 때 온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속도를 늦출 때 결국 실패하게 된다는 것에는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은 그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와 처벌을 피할 수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살려두지 않으시는 자를 살려주며 하나님이
죽이시지 않는 자를 죽이는 것에 대한 댓가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의 처벌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온전히 승리하지 못할까요? 왜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살아가지 못할 까요? 승리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과 계획을 다 알면서도 왜 순종하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이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좋으면 하고 우리가 싫으면 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목표도
계획도 없이 그저 우리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만 두고 싶을 때 그만
두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지만 대신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계약을 중도에 포기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지만 대신 위약금을 물어야 합니다.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싶다면 그래도 되지만 대신 학력을 인정받지 못합니다.
직장생활을 그만 두고 싶다면 그럴 있겠지만 그 대신 월급은 없습니다. 교회생활도 그만두어
보십시오. 그런다고 뭐라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만 대신 신앙생활을 통해 얻었던 유익은 없습니다. 운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운동할 때의 유익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계약도 포기하고 위약금도 안물며, 학업을 포기하더라도 학력을
인정받고, 직장을 그만두더라도 월급을 받으며, 교회를 떠나더라도
축복은 계속되며, 운동을 하지 않더라도 계속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며 어느날 갑자기 그 모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자각은 찾아오고 희생은 감수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받게될 일의 결과입니다. 이런 모습은 옆사람을 안타깝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이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결국 스스로 망해가는 것이고 그것은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목표와 계획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더 새롭게 만듭니다. 지나간 것을 놓으려 함이 아니라
앞에 있는 새로운 것을 붙잡으려 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새힘을 얻을 수 있고 그와 더불어
노력함에서 오는 모든 좋은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온전히 승리를 취하였던 것처럼 우리 모두도 정말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승리를 누리는 그런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