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발전] 40마 15; 25-31 하나님이 들으신 신앙의 소원2Loading the player...
40마 15; 25-31 하나님이 들으신 신앙의 소원2_5
2019. 4. 19. 금. 금요철야
*개요: 마태복음 연구 [마]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15: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마]15: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15: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마]15:30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마]15:31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우리에게는 신앙의 소원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신앙적인 많은 결핍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뭔가 부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삶에서 먹을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입을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잘 곳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의식주의 문제가 생기거나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결핍을 느낍니다. 장난감이 부족하거나 도구가 부족하거나 사랑이 부족하거나 인기가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그 부족과 결핍이 신앙 안에서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랄 때 우리에게는‘신앙의 소원’이 생겨납니다. 여유있고 풍족하며 넘쳐날 때에는 어떤 바램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항상 뭔가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 결핍이 일어나고 그 결핍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그럴 때 ‘신앙의 소원’이 생겨납니다. 그 바램들을 하나님께 의지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채우심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신앙의 소원’이란 삶의 여러가지 결핍들을 단순히 자신의 능력으로 인해서가 아닌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문제를 느끼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가장 처음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거니시는 동산에 아담과 하와가 살고 있을 때입니다. 그곳에 그들은 벗었으나 옷이나 집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을 따로 보관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어떠한 결핍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 자체로 모든 것이 충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고자 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했을 때 그들은 더이상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죄를 저질렀고 그 죄악 속에서 그들이 가까이 한 것은 사탄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 어떻게 사탄이 함께 거할 수 있는가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신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는 항상 선과 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이었기 때문에 완전한 악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 완전한 자유의지속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기를 바라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안타깝게도 악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가 없게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세상으로 나오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 그들이 거하게 된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결핍되게 되었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거할 곳도 없습니다. 유형의 혹은 무형의 모든 것에서 혹독하게 결핍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에덴동산 밖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오직 거친 삶의 모든 필요에 대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상황이 바뀌어서 에덴동산에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을 기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벌을 받는 자들로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자들로서 다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첫 번째 아이를 낳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아이를 얻었다는 의미로 그 이름을 가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4장 1절입니다.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아담이 하와의 동침하였고 하와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왜 하와는‘내가 하나님으로 인해 아들을 얻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지만 하와가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는 모든 과정 중에서 하나님을 찾고 도우심을 간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벌을 내리신 분이었지만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시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그녀가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매몰차게 대하셨을 때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마]15: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마]15: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예수님이 좀더 친절하게 대해주셨으면 좋았을 것 같지만 사실 이 여인은 지체높은 헬라인 가문의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어려운 것은 자존심을 굽히고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시험하셨을 때에 이 여인은 겸손하게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진심으로 간구하였습니다. 그것은 진실로 예수님을 경외하며 예수님의 판단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그 소원에 응답하셨습니다. “[마]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 여인에게 말씀하신‘네 믿음’은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바로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은 자기보다 더 높은 자신의 주인이시라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 소원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을 통해 자녀의 병이 낫기를 간절히 바라는 어머니의 삶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삶의 어떤 결핍을 아뢰고 도우심을 받고자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와도 가인의 출생에 대해서 하나님께 간구하여 들으심을 얻은 것이고 가나안 여인도 예수님께 나아와 들으심을 얻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그 들으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삶의 문제들은 내 자신의 개인의 문제와 우리 가정의 문제와 교회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모든 영역들이 전부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는 삶의 소원의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삶의 소원을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 그것은 문제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목표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단지 현재의 어려움이 해결되기만을 바라는 수동적인 것이지만 목표는 미래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능동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소원을 가지고 그 문제 속에서 혹은 목표 속에서 주님을 날마다 바라보며 주님의 도우심을 날마다 기대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 있는 문제와 목표로 이루어진 삶의 소원을 하나님 안에서 이루게 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문제와 목표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와 목표를 이루게 하시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신 것처럼 우리 중심으로 모든 것이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나 목표로 시작이 되었지만 그 끝은 우리의 문제와 목표의 해결이 아닙니다. 그 끝은 우리의 문제와 목표를 해결해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우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의 소원으로 나아올 때마다 사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가나안 여인과의 일이 끝난 다음에 어떤 일들이 이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십시오. 29절입니다. “[마]15: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을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셨습니다. 거기에서 산에 올라가서 앉으셨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다리 저는 사람과 신체장애인과 맹인과 말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마]15:30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마]15:31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그래서 말못하던 사람은 말하게 되고 신체장애인은 온전하게 되고 다리를 절던 사람은 걷게 되었으며 맹인은 보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일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지금도 이와 같이 문제를 가지고 온 자들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다면 지금도 이러한 일들은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바로 문제를 가지고 온 자들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능력을 의지하고 사모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주님의 풍성하심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신앙의 소원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 것도 구할 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노력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노력할 것이 없으면 도와주실 수 있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신세도 지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면 우리는 마땅히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문제를 그리고 우리의 목표를 들으시고 도와주십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는 것을 보십시오. 스스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개라고 여겼던 가나안 여인이 자신의 딸에게 있던 귀신들림을 고침받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와는 또 다른 그리스도의 피로 사하심을 받은 그분의 백성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아바아버지라 부르짖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마땅히 삶의 소원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삶의 소원을 올려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들으시고 그 들으심으로 인해서 영광받으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 영광돌림을 기대하며 더욱 삶의 소원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4생활설교 관련글[더보기]16설교소감 관련글[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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