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발전] 40마 4; 1-4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2Loading the player...
40마 4; 1-4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2_5
2018. 8. 31. 금. 금요철야.
*개요: 마태복음 연구 [마]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우리 삶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아버지는 당연히 가정을 책임져야 하고 어머니는 당연히 자녀를 돌보아야 하고 남편은 당연히 아내를 사랑해야 하고 아내라면 당연히 남편을 섬겨야 하고 아들은 아들로서 노릇을 해야 하고 딸은 딸로서 자기 맡은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지탄을 받게 되고 그렇게 하는 것은 그냥 너무나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구원 사역을 이루신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심드렁합니다. 아무런 감동도 없고 별로 대단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분은 자기가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오심은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 식상해 보입니다. 그리고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오래 교회를 다닌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오심은 닳고 닳은 이야기가 아닙니까?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좀더 큰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관계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학교, 직장에 관계된 것이기도 하고 우리 나라에 관계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 이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이야기와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우리가 우리의 문제에 더욱 집중할 때보다 하나님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때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것도 그냥 쉽게 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걸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이야기로 들어가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제일 처음 맞이하신 것은 ‘사탄의 시험’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시험을 거치신 후에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나이가 30세입니다. 우리 식으로 생각해볼 때 무척이나 젊은 나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수염을 기르고 외모가 좀더 나이 들어 보인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나이는 그리 많은 나이는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바로 그 때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이 시험에 대해서 하나 하나 생각해 본다는 것은 꽤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그 중에서 한 가지 시험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머지 시험에 관한 것은 이어지는 설교 속에서 계속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볼 것은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 중 첫 번째 시험입니다. 이 시험의 목적은 분명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탄에게 무릎을 꿇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였고 예수님은 사탄에게 무릎을 꿇지 않도록 견디셨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받으신 시험의 의미였습니다. “[마]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사탄은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주님께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유혹했습니다. 그것도 오랜 금식 중에 가장 주리셨을 때에 그런 유혹을 했습니다. 사탄은 인간이신 예수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분명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이 무슨 유혹이 될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단지 그렇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배고픈 상태에 계신 주님께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제안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치명적인 유혹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배가 고프면 정말로 돌을 떡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진학을 간절히 바라는 학생에게 학교는 더 이상 학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떡이 됩니다. 취업을 간절히 바라는 졸업생에게 직장은 더 이상 직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떡입니다. 결혼을 간절히 바라는 미혼남녀에게 결혼은 더 이상 돌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떡이 됩니다. 성공을 바라는 사람에게 풍요로운 삶을 바라는 사람에게 평안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은 돌이 아니라 떡이 됩니다. 그리고 그 떡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그렇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돌을 떡으로 만들어서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필요입니다. 그 필요를 추구하며 살아가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영적인 욕심조차도 떡이 됩니다. 더 많은 방언을 하며 더 깊은 신앙적 체험을 하며 더 은혜로운 찬양을 하며 더 감동적인 설교를 듣고자 하는 마음, 그것도 역시 나름대로의 떡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실패와 좌절로 몰아넣고 맙니다. 일단 돌을 떡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너무나 참담한 일이 일어납니다. 학생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학하기 위해 애씁니다.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서라면 불의도 불사합니다. 그 목표를 이루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라 이를 위해서는 신앙생활도 포기합니다. 직장만 갈 수 있다면 어떠한 양심의 기준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결혼을 정말로 원한다면 어떠한 생활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계획을 세울 수 없습니다. 성공과 평안과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고자 할 때 이에 반대되는 모든 생활양식은 거추장스러운 것이 됩니다. 또한 영적인 유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다니던 교회를 그만두고 더 새롭고 신비한 교회를 찾아다니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그런 욕구를 채워주는 곳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늘도 거리에서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과 계획을 따르고 있습니다. 자신을 너무나 잘 아는 목사님의 조언과 충고도 무시해버립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판단과 생각에 따를 뿐입니다. 이런 것은 극단적이고 적극적인 방면의 노력입니다. 하지만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노력도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서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하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노력과 최소한의 역할 감당 속에서 우리는 점차 돌을 떡으로 만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적당한 예배와 적당한 기도와 적당한 찬양, 적당한 봉사 속에서 우리는 나름대로의 필요를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말씀’을 따르는 삶도 아닙니다. 그것은 변형된 ‘떡’일 뿐입니다. 진실한 말씀은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생각 속에서 나온 것은 결코 ‘말씀’이 될 수 없고 사탄의 유혹일 뿐입니다.
한번도 이러한 사탄의 유혹을 이긴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늘 죄악된 삶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게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그 시도에서 사탄은 처절하게 패배했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사탄에게 ‘나는 돌을 떡으로 만들며 살아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더 핵심적인 것을 말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은 떡으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부족한 것을 의지하면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 속에서 살아갈 때에 더욱 중요한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이것을 이겨내셨기에 그분은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시험에 굴복해 버리셨다면 그분은 결코 메시야가 될 수 없었고 구세주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세상의 떡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진학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길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직장을 위해, 결혼을 위해, 명예를 위해, 성공을 위해, 편안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보잘 것 없이 보일 뿐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그 말씀에 따라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위대하신 것입니다. 단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것보다 그 사소해 보이는 시험, 그러나 너무나 우리 모두가 쉽게 져버리는 그 시험을 이기신 분이시기에 주님은 위대하십니다. 그랬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다니엘의 세 친구였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였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환관장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냐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총애하는 자’였는데 사드락인 ‘태양신에게서 빛을 받았다’로 바뀌었습니다. 미사엘은 ‘누가 하나님과 같으랴’였는데 메삭인 ‘누가 샤트 여신과 같으랴’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아사랴는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다’였든데 아벳느고인 ‘불의 신 느고의 신실한 종’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름의 변화가 그들의 신앙의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이 신상을 세우고 절하라 할 때에 단언했습니다. “[단]3: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단]3: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단]3: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더라도 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진실함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과 함께 풀무불 속에 있는 영광을 얻게 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풀무불에서 뿐만 아니라 왕의 손에서도 역시 그들을 건져내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분을 닮아갑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를 격려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시험을 이겨낼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돌을 떡으로 만들지 않게 도와주십니다. 떡을 위해 살아가지 않도록 격려해 주십니다. 진학도 해야하고 취업도 해야 합니다. 결혼도 해야 하고 성공도 해야 합니다. 좀 쉴 때도 있고 편안한 삶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것을 위해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표이여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우리가 세상의 떡을 위해서 살아갈 때에 반드시 슬픔과 좌절을 맛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탄의 시험이었고 진짜 떡이 아닌 것을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냥 돌일 뿐입니다. 돌을 떡처럼 먹으려고 했던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우리를 구원만 해주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친히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굶주림 속에서도 사탄의 유혹을 거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사탄은 부르짖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딸들입니까? 정말로 우리는 떡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게 고백하며 그렇게 실천하고 있습니까? 얼른 귀를 막고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리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의 사람들 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더욱 돌을 떡으로 만들며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오심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도 역시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고자 다짐하는 여러분들에 주님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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