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발전] 15스 10; 9-12 하나님의 전 앞에서 이루어진 일이 무엇인가2Loading the player...
15스 10; 9-12 하나님의 전 앞에서 이루어진 일이 무엇인가2_2
2021. 10. 2. 주. 주일오후. 온라인설교
*개요: 에스라 연구 [스]10:9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들이 삼 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니 때는 아홉째 달 이십일이라 무리가 하나님의 성전 앞 광장에 앉아서 이 일과 큰 비 때문에 떨고 있더니 [스]10:10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스]10:11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스]10:12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변화란 일어나지 않는다고 체념해버립니다. ‘사람은 절대 안 변한다’고 단언해 버립니다. 그리고 정말 그 말대로 간절히 원하는 변화는 아무리 시간이 오래 흘러도 저절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변화의 의지를 가질 때만이 비로소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변화하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변화를 이룰 수 있는 강한 변화의 의지를 갖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바로 변화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마음 속에 존재할 때에 변화를 위한 노력이 행동 속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에스라의 경우에 그에게는 이전부터 변화를 위한 간절한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가 변화를 위해 감당했던 모든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과 좌절의 결과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9절을 보십시오. “[스]10:9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들이 삼 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니 때는 아홉째 달 이십일이라 무리가 하나님의 성전 앞 광장에 앉아서 이 일과 큰 비 때문에 떨고 있더니”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 앞의 광장에 모였습니다. 바로 이방여인들과의 결혼문제 때문에 모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인해서 큰 비가 내렸는데 그 비를 통해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두려워하면서 사람들은 떨었습니다. 이제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이방족속과의 통혼의 죄를 자각은 하고 있었으나 괴로워하지는 않았습니다. 죄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로 인한 괴로움은 느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죄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점차 감각은 시들해지고 남은 것은 이해 정도만 있었습니다. 그것이 악한 일이었구나라는 생각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꾼 것은 바로 에스라였습니다. 지금까지 애쓰고 노력했던 에스라가 아니었다면 이 모든 죄는 그냥 묻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전 앞에 이 문제 때문에 모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편했을지 모르지만 그 대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회복 불능의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에스라의 절망과 고통으로 인해 자신들의 무감각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커다란 하나님의 심판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에스라의 희생과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도 동일한 변화에의 의지가 있습니다.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대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 변화의 시작은 세상이건, 다른 사람이건, 혹은 자기 자신이건 간에 변화에의 의지가 있을 때에 시작됩니다. 그 의지가 변화를 위한 과정을 진행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변화에의 절망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변하지 않고, 사람들도 변하지 않고, 우리 자신도 변화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제 버릇 개 주겠느냐고,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간은 변화될 수 없다고 자조합니다. 결국 이 변화에의 절망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때문에 항상 모든 것은 동일하게 진행됩니다. 그런 모습으로 인해서 스스로 불편하고 괴로워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의 결과를 바라보지 말고 조금 더 멀리 바라보십시오. 시간이 흐르면 현재의 모습이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과 변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은 지금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흐르면 커다란 차이가 납니다. 왜냐하면 변화를 원한다는 것은 어차피 살게 되어 있는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쪽으로 가는 것과 서쪽으로 가는 것의 방향의 차이가 결국 도착지의 차이를 만드는 것처럼 우리가 변화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변화를 포기하며 살아가는 것과의 엄청난 차이를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변화를 추구한 것의 결과란 변화를 추구하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변화를 추구했을 때 그로 인해 생겨난 그 어떤 것 보다도 변화를 목표로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달라지게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변화를 추구하게 됩니다. 변화를 추구하면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됩니다.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스]10:10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스]10:11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에스라는 그냥 이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들을 끊어버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민족우월주의를 내세우고 영광스러운 선민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자고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범죄하였고 하나님께 죄를 더하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점입니다. 이방여인들과의 결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죄가 되는 이유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 뜻대로 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그러한 삶을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신앙의 회복과 신앙인으로서 삶을 살자고 하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또한 현실에서의 비리와 죄악을 끊어버리자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정말 더 중요한 것은 왜 그렇게 하려고 하는가입니다. 더 큰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더 고결한 삶으로 살아가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분과의 관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상황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앙의 모든 수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스라가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없을 때의 회복과 변화, 거룩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살인하지도 간음하지도 않았습니다. 십계명을 온전히 지킨 그들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대신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심각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외면의 모습으로 무장한 자기애만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자들이 설사 삶이 거룩했다 하더라도 신앙이 거룩한 것은 아닌 이유는 죄악된 삶을 대치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거룩, 정결한 삶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버리고 변화하려는 것이지 단지 그렇게 사는 삶이 좋아 보이기 때문이거나 그래야 더 많은 유익을 누리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는 순간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의지하게 됩니다. 그 자체가 바로 우리가 변화하려고 했던 모든 노력의 결실이 됩니다. 목적지가 하나님께 가는 것이면 중간에 내리지 않습니다. 끝까지 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노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에스라는 애초에 말씀을 가르치고 성전을 재건하려는 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에서 그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 보다는 말씀대로 살게 하는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라기 보다는 성전 앞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삶에 대한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과연 에스라는 엉뚱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원래 하려고 했던 일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에스라가 원했던 일이 바로 이런 일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그것을 지키게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스]10:12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큰소리로 대답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단지 율법을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성전을 재건하는 일과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어차피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이미 재건된 성전은 유지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을 갖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드릴 때에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에스라가 이러한 이유로 이방여인들과의 통혼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을 때 그는 가장 해야할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에스라서는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에스라가 성전재건에 관한 이야기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들의 신앙의 삶이 재건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건축은 아무리 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다시 무너뜨리실 수도 있습니다. 정말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인간의 삶입니다. 우리 자신이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나, 혹은 이 세상입니다. 그 대상에 관계없이 무엇이든 변화시키려고 할 때에 비로소 신앙인의 삶이 의미있게 되었습니다. 에스라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우리도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하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변화를 이루려고 할 때에 바르게 설 수 있습니다. 또한 귀한 일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일 때 주님을 닮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간절히 사모하고 기대했던 에스라가 감당해야 일은 하나님 전 앞에서의 변화와 발전이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일어나야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만들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과 그분의 형상이 우리 속에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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