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발전] 7삿 11; 29-33 하나님께 서원하는 입다2Loading the player...
7삿 11; 29-33 하나님께 서원하는 입다2_4
2018. 4. 18. 수. 수요예배
*개요: 사사기 연구 [삿]11:29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삿]11: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삿]11: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삿]11: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삿]11: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많은 사람들이 서원을 하지만 이러한 서원들이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서원으로 인해 올무에 잡히게 되고 문제와 괴로움에 빠지게 되는 것들입니다. 더 많은 헌금을 작정했다가 그것이 평생의 괴로움이 되기도 합니다. 섣불리 자녀를 목회자로 서원했다가 그 길을 가지 않으려는 자녀와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직분에 대해서 서원했다가 이행하지 못했을 때에 그것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전부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서원으로 인한 실패의 경우들입니다. 서원을 시작할 때에는 기쁨과 감사와 소망으로 시작했지만 그 마지막은 괴로움과 좌절로 마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서원의 현주소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왜 이렇게 서원은 실패하게 되는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서원이 성공으로 나타나서 훌륭한 결과와 열매로 나타나지 못하고 늘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귀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입다는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서원을 통해서 자신의 승리에 확실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것에 있어서 그는 악한 씨를 심고 있습니다. 바로 서원의 내용에서 실패하였던 것입니다. 서원의 내용에서 실패하였다는 부분은 31절에 나타납니다. "[삿]11: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그는 하나님께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는 서원을 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승리와 성공을 위해서 그러한 서원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서원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게 되는 주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가 이러한 어리석은 서원을 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승리를 도와주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과 절박함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흔히 행해지던 인신공양을 선택하면서 어리석은 서원으로 나아갔습니다.
서원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마땅히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어야 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를 희생하거나 악하게 만드는 것이 서원의 내용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은 그 스스로 뿌린 씨앗을 거두게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거부해 주시기거나 혹은 무효화하시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입다에게 승리를 주고자 하셨고 그 일을 마침내 이루셨습니다. “[삿]11: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삿]11: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 것은 그가 서원을 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두려움이나 절박함으로 인간을 번제로 드리는 어리석은 서원을 한 이상 입다는 그 서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말이 씨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비슷한 경우로 헤롯 왕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막]6:22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막]6:23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그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지만 그것을 오해하고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스스로 죄악을 짓는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입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자신이 모든 것을 행한다라고 생각했을 때 더욱 절박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29절에서 입다가 바뀔 수 있었던 하나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삿]11:29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특히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영이 임한 부분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해서 승리를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지 서원을 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의 영은 입다와 그 무리를 인도하셔서 길르앗과 므낫세와 미스베에 이르게 하셨고 암몬 자손에의 승리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인도하심을 깨닫고 더욱 담대했더라면 입다는 어리석은 서원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뿌린 그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그들에게 연약하고 죄악된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 그대로 결과를 얻게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다른 방식이나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서원도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한다면 온전한 헌신이 나오기 어렵고 자신의 어리석음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힘을 다하여 정신을 차려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과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서원 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서원이 불가능한 것, 끔찍한 것, 하기 싫은 것, 해서는 안되는 것을 하려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올무에 던지는 것일 뿐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간구하며 바라고 있는지를 잘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입다의 경우 그가 자신의 성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랬다면 개인적인 그러한 희생을 담보로 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할 때 그 일에 필요한 것들은 타인의 희생이나 고통이나 괴로움이 아니라 나의 희생과 괴로움과 고통이며 심지어는 그런 것들까지도 단순한 자학적인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애써 달려가고자 할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늘 나아갈 수 있는 방향과 길과 능력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되지 서원이나 그밖의 약속이나 작정이나 하는 것들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의지하면서 실족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공의로 나아가시는 어려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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