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3:14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눅]23: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눅]23: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눅]23:17 (없음)
[눅]23: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눅]23: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눅]23: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눅]23:21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눅]23: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눅]23: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눅]23:24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눅]23:25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우리는
이번 주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각자의 삶속에서 나름대로의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을 줄 믿습니다. 그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생각하셨을 줄 믿습니다. 절기의 의미는
기념하는 것에 있고, 특히 고난주간과 부활절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고난과 부활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의 본질이며 핵심입니다.
우리는 우리 구원의 가장 근본되며 기초가 되는 주님의 죽으심과 살으심을 묵상하면서 더욱 더 우리 구원을 확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죽으심과 살으심을 묵상하는 것은 단지 고난주간과 부활절에만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끊임없이 주님의 죽으심과 살으심을 묵상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또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이렇게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내 삶속에서 형상화됩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나의 옛 모습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새로운 모습을 덧입는 것입니다.
이제 고난주간의
묵상이 단지 이 주간에만 끝나는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어지는 부활절의 즐거움이 단지 주일 하루에만
그치는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 속에 고난주간의 묵상과 부활절의 즐거움이 한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지속되는 것이 되게 만드는
비밀이 있습니다. 이제 그 비밀을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본 성경 말씀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양옆 행악자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려 계십니다. 이미 대제사장의 뜰에서의
모욕과 빌라도앞에서의 재판과 군병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하신 후에,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신
뒤에 아침 9시부터 십자가에 못박혀서 달려 계시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전
소름끼치던 고통의 비명소리도 이젠 간곳없고, 오직 십자가 위에서 들려오는 것은 끔찍한 고통을 견디어
내고 있는 세 사람의 가뿐 신음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피맺힌 한숨이었습니다.
도저히
한 순간도 참을 수 없을 것 같던 뼈가 으스러지고 피가 말라버리는 고통은 이제 조금씩 견딜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손과 발에 전해지는 대못의 뼈를 후벼 파는 듯한 고통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게 되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말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예수님의 양 옆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가
간신히 있는 힘을 다 내어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그는 도저히 그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기에
있는 모든 힘을 다 쥐어 짜내어서 예수님께 대해서 외쳤습니다.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이 사람에게는
옆에 달린 예수님의 존재는 그리스도라는 이야기만 들은 적이 있는 자이었습니다. 그리스도란 히브리어로
메시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행악자의 말은 ‘네가 메시야가
아니냐, 네가 그 능력이 많고 우리 민족을 구원한다던 자가 아니냐, 그러니
한번 우리를 구원해 봐라, 너 자신을 구원하고 더불어서 우리도 같이 구원해 봐라’라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너도 꼴사납게 그러고 있지 않느냐? 네가 그리스도라도 별 수 없었지 않았느냐? 네가 정말 그리스도라면
어디 한번 네 자신을 구원해 봐라, 그리고 구원하는 김에 우리도 아니 나도 좀 구원해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건 완전한
조롱이자 야유입니다. 간구가 아닌 항의입니다. 오로지 자신이
받는 괴로움이 너무나 심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물어 뜯고 싶은 심정에 이렇게 주님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행악자의 말은 단지 이 사람 혼자서만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사실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날 좀 구원해 주옵소서’
‘하나님, 능력이
이렇게 없으십니까? 이거 한번 못도와주십니까?’
‘하나님 창피하시지도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주님 스스로를
구원하시고, 더불어 우리도 구원해 주옵소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듯한 극심한 인생 속의 고통의 속에서 우리도 날마다 주님께 말합니다. 온힘을 다 짜내어
주님을 부릅니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과연
이 행악자에게 주님이 응답하셨습니까? 한마디라도 대꾸하셨습니까?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주님께 조금의 변화나 미동이라도 있었습니까? 주님은 상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쪽 편의 행악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다르게 말했습니다.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이 사람에게는
뉘우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있었습니다. 회개함이
있었습니다. 그 증거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바로 내 탓이다, 내 잘못이나, 내 부족함이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대해서 올바른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옳지 않은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하신 일은 모두 옳은 것이다라는 확신과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소망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이 일을 이루실 때, 온전히
이루실 때, 완성하실 때, 주님의 나라에 임하실 때, 부족한 저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저를 생각하여 주옵소서. 저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옵소서’라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란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주사 인생들로 하여금 앞일을 예측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반드시 우리에게는 나쁜 일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주님의 고난받으심을 생각하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하심을
바라보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이 다른 쪽 편에 있던 행악자처럼 회개하는 것입니다. 내 죄때문에 이렇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 다른 환경, 다른 상황 핑계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일은 옳은 일이다. 그분이 내게 행하신 일도 옳은 일이라는, 주님은 이 일을 선하신
뜻가운데 허락하고 계신다는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회개하는
행악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응답해 주셨다는 사실보다도,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보다도 더욱 더욱 더욱 더 중요한 말은 네가
나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니 오늘 밤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 있다가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부터 나와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회개한
행악자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자기 죄로 인하여 매달린 것이었지만,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소망을 두고 약속을 받은 그 순간부터는 주님과 함께 매달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시간부터 죽음에 이를 때까지의 시간은 그 뒤에 올 낙원에의 소망으로 인해 오히려 감사로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인생의
십자가가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숨이 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낙원에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위해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이 있습니다. 주님의 남은 고난이 있습니다.
날마다 애타는 심령으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길 위해 함께 애통해 하시는 주님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 십자가에
매달리게 된 이유는 각자 다 다를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죄와실수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상관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는지를 묻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와 함께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조금 있으면 낙원에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이 약속을
붙들고 주님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낙원에의 소망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있음을 기억하고 더욱 주님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날마다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불어
주님과 낙원에 거하게 될 주님의 부활을 감사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고난과 영광은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영광을 늘 간직하는 여러분에게 우리들 자신의 고난의 인내와 우리들 자신의 부활의 소망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