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 에서는 약속의 자녀가 되지 못한 사람이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약속의 말씀, 약속의 자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약속의 자녀였고, 이삭은 약속의 말씀에 의한 자녀이기 때문에, 약속의 자녀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삭의 아들도, 그 아들의 아들도, 계속되어지는 후손은 약속의 말씀에 의해서만 약속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속의 말씀에 의해
되어지는 약속의 자녀를 그 후손을 통해 계속 살펴볼 수 있으며, 바로 우리들도 약속의 말씀에 의해 약속의 자녀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에 의한 약속의 자녀라는 계보와
함께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에서입니다. 이삭의 아들이었지만, 에서는 약속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약속의 자녀가 되지 못한이유는 단지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음
뿐만 아니라,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살펴볼 하나님의 택하심이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약속의 자녀를 부르셨다.
성경말씀이 이러한 택하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리브가가 이삭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아직 그 복중의 태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을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을 받았고,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을까요? 동일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왜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시며, 누구는 택하고 누구는 버리십니까?
우리는 택하심에 대해 쓸데없는 오해를 일으키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 택하심의 의미를 빨리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태어나지도 않은 자를 택하셨던 이유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우리의 택하심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3. 하나님은 구원의 주권이 하나님의 것임을 통해 확신을
갖게 하신다.
우리를 택하심이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안심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택하실 수 있고, 택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우리가 끊임없이 순종해야 하고, 한번도 실수하지 말아야 하고, 순간의 잘못이 돌이킬 수 없는 버리움을 당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얼마나 두렵고 떨리며, 무섭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를 택하심은
너에게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굳건한 반석이며, 기쁨이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기쁨과 위로와 안심하게 된 우리가 그 다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러면 에서는 어떻게 되느냐’일 것입니다. 우리의 택하심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어서 든든하고 확실한 택하심을 우리는 받을 수
있다면, 그렇지 못한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약속의 자녀였던 이삭의 아들로서, 이삭의 사랑을 받았던 에서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에서의 모습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특권을 귀중히 여겼습니까? 하나님의 복주심을 사모하였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까? 또한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결혼을
하였습니까?
만약 에서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었다면, 달랐을 것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입니다. 이미 존재해 있는 삶을 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칫 하나님의 공의하심과
택하심을 불의하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에서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앞으로 보게 될 말씀이지만, 15절 말씀을 미리 보십시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주님께서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주권을 통해 연약한 모습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가장 더 크게 우선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것은 애써 설명되기 보다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피조물에게 일일이 설명하시지
않습니다. 변명하시지도 않습니다. 이해해 달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십니다. 천지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처음과 나중까지
섭리하시며 조정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주관하심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우리들은 굳건한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택하심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택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로 그것을 변개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그 택하심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은 그 부르심을 귀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택하심을 받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늘 주님의 부르심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을 기억하고, 더욱 열심히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십시오. 택하심을 따라 된 그분의
부르심이 우리 가운데 주님의 뜻안에서 각자의 삶속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르심에 따라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