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리버디노 구레네
인, 알렉산드리아 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6:11 사람들을 가르쳐
말 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6: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6: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6: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은 우리가 아는대로 초대교회때에 순교한 집사입니다. 첫번째 일곱 집사로 직분을 임명받은 후에, 열심히 성령에 따라 복음을
전파하고 능력을 행하다가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아 돌에 맞아 죽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 아는 대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 회심하기 이전의 바울은 옆에서 사람들의 옷을 맡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스데반의 얼굴에 대해 놀라운 표현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것은 다른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아무에게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말하는 곳은 없습니다. 천사면 천사,
사람이면 사람이지, 천사가 사람으로 내려온 경우는 있어도 사람이 천사의 얼굴로 바뀌는 경우는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이 가장 많이 변한 경우는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경우인데, 그가 산에서 40일 밤낮으로 금식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뵈고 나서 다시 세상으로 내려왔을 때,
그 얼굴이 밝게 빛났습니다.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두려워서 그 얼굴을 쳐다 볼 수가 없었고, 모세는 그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웠습니다. 아마 사람들의 불편을 의식했던
것일까요?
히브리서에서는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운 것은 어차피
나중에 없어질 영광이니까 가리웠다고 하였습니다. 어차피 얼굴이 빛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니까 나중에
빛이 사라지고 난 뒤에 모세가 달라졌다고 말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얼굴이 빛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가 산에 40일간 있어서가 아니고, 40일간 밤낮으로 물도 먹지 않아서가 아니고, 그가 빛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에 그 얼굴이 반사되어 그 얼굴에 빛의 잔향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체엔 ‘인’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빛에 대해서 반사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빛이 오면 그
빛을 반사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인이 노출이 가장 많은 얼굴에서 빛을 받으면 그 빛을 반사하고
발산합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빛은 바로 이러한 ‘인’의 발광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과 함께 있었는지는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처음으로 율법과 계명을 내려 주셨습니다. 친히 준비하는 돌판에 그 손으로 글씨를 새기시면서, 400년간 애굽의
종노릇을 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기 위한 모든 삶의 규칙들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돌보시는 자와 돌보심을 받는 자들로서의 언약을 맺으며, 가나안 땅을 상속받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과 만날 수 있었고, 직접 대면하여 하나님의 주시는
율법을 받았고, 그리고 그 율법을 사람들에게 가지고 내려온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통해 그 자신의 얼굴이 밝게 빛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가 받게 되는 은혜요 은총이며 영광스러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스데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괜히 얼굴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금식을 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그가 두문불출하고 기도를 많이 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가 여타 다른 사무와 일에 전념하면서 그렇게 얼굴이 변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한 일을 좀 보십시오. 그는 그때까지 무슨 일을 있었을까요?
“6: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6:9 리버디노 구레네
인, 알렉산드리아 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그는 은헤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그들과 열심히 변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들과 변론할 때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스데반의 말하는 것을 당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리들을 충동질하여 스데반을 붙잡아 공회에
대리고 와서 재판을 받게 합니다. 그리고 그가 전하고 있던 말에 대해 희롱하며 핍박하고 공격합니다. 그러자, 이제 스데반이 그 모든 말에 대답하고자 일어섰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 때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람들이 당해내지 못하는 그의 지헤와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두려워함 없이 담대하게 전하는 그의 열정은 도대체 무엇을 전하는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구원자라는, 메시야라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오직 그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그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모세가 그러했듯이, 스데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사람은 동일하게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려고 했습니다. 주님의 원하시는 일을 했습니다. 스스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의 생각과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에 대한 모든
설명에서 이러한 것은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스데반은 은혜와 성령으로 말하였던 것입니다. 지혜와 기술로 말하지 않고, 술수와 속임수로 말하지 않고, 정직과 신뢰로 말하지 않고, 오직 은혜와 성령으로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의 종입니다. 사람의 뜻에 따라, 사람의 일을 할 때에, 사람의 종입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의 뜻에 따라, 사탄의
일을 할 때에, 그는 사탄의 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종인지, 사람의 종인지, 사탄의 종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누구의 뜻을 따라 누구의 일을 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누구를 위해서 일하며, 누구를 이롭게 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때때로 적군에 속하면서 아군을 이롭게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아군에 속하면서 적군에 이로운 일을 하는
자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스파이요, 내부의
적이요, 배반자들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편에 있다 하면서
사탄에게 이로운 일을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볼 때에, 천사의 얼굴을 갖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천사의 일을 해야
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얼굴만 웃는 상, 밝은 상, 즐거운 상만 하고 다니는 자가 천사의 얼굴을 한 자가 아닙니다. 천사란
누굽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부리시는 영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받으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 모셔 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의 얼굴은 다른 것입니다. 천사는 과연 천사의 일을 할 때에만이 천사인 것입니다. 천사가 천사의 일을 하지 아니할 때에 그는 사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얼굴만
바꾸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인상만 바꾸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표정관리에 신경쓰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을 하는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가 가의 얼굴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은 어찌되든지 간에 얼굴만 잘 관리하면 된다는
세상의 사교술이나, 인생의 법칙같은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어 진실하게 속사람과 겉사람이 일치하여 무엇을 바라보느냐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전도하고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고 해서, 우리도 같은 일을 해야만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나
편협한 생각입니다. 그는 은혜와 성령을 따랐던 것이지, 전도와
말씀에 전념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은헤와
성령을 따르고자 할 때에 우리의 모든 24시간이 성령님께 지배받는다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한 시간이 내게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숨쉬고 살아있고
깨어있는 모든 시간 시간 일분 일초가 내게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이 될 수 잇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바라보는 것은 세상이 아니요, 나 자신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일 수 있습니다. 그일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얼굴이 하나님을 향하게 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 빛으로부터 나오는 광채를 인하여 평화로움과 안식함과 온전히 내어 맡김과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 모든 것으로 풍성하여지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재판하기 위해 공회중에 앉은 사람들은 이제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분에서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됩니다.15절
말씀입니다.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천사의 얼굴을 사람들이 본 적이 있었을까요? 천사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사람들이 알까요?스데반의 얼굴을 보며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공회중에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입니다.
지금 공회 중에 앉아있는 자들은 스데반을 끌고 온 자들입니다. 거짓증인을 내세워 스데반의 말을 꺾으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살기가
등등하여 스데반을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고 벼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스데반을 보았을 때에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냥 스데반의 얼굴을 그 얼굴대로 보고 있습니다. 아니, 증오와
미움에 가득차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스데반은 한낱 가냘픈 인간에 불과했고, 자신들의 손으로 어찌할 수 있는 무력한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지 몰라도, 성경은 말하기를,스데반은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 판단은 사람들의 판단이 아닙니다. 세상의 판단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판단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판단이며, 스데반의 모습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판단인 것입니다.
이 세상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천사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습은 불쌍하기 그지없는 초라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우리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아닙니다. 현실과 사실은 다릅니다. 현실은 초라하고 나약하며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으며 세상사람들의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을찌라도, 사실은 그렇지 않아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유명한 자들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신실한 자들이고, 하나님 앞에 천사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세상 사람들은 스데반의 얼굴을 미움과 증오로 바라보지만, 성경말씀은 그 얼굴을 천사의 얼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애쓰던 은혜와 성령에 따라 순종하던 그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던 그 얼굴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얼굴에 대한 판단을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에게 받는 칭찬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서 얻는 영광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내리는 신령한 칭찬과 영광을 기다리는 자입니다. 그
영광을 기다릴 때에 낙심하고, 실망하여, 선한 일을 중지하는
자들이 아니라, 끝까지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들이 되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얼굴을 하나님께서 드시사 존귀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마치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주께서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고 존귀케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인내와 승리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