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8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9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ㄴ)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10또 가로되 ㄷ)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1또 ㄹ)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2또 이사야가 가로되 ㅁ)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13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러분은 다음의 두 가지 모습의 사회 중에서 어떤 사회가 더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밟고 일어서는 사회이고, 다른 하나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도우며 일으켜 세우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두 번째 사회가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밟고 일어서는 사회란 동물들의
세계입니다. 약육강식의 세계입니다. 약한 자는 잡아 먹히고, 강한 자는 잡아 먹으면서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이런 세계는 오직 동물들의 세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의 세계는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이 동물들과 똑같이 되버리는 잔인하며 비인간적인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그 연약한 부분을 도와주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1절 말씀도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모두가 이러한 가르침에 동의하고, 스스로가 이렇게 살아야
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분명 우리 인간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도우며 살아가게 되어 있고, 그래야 인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또한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때로는 한 두번 연약한 자를 돕습니다. 혹은 두 세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열번이 되고, 스무 번이 되고, 백 번이 되면 지칩니다.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약한 자를 돕는 것이란 다 이렇게
한계가 있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끝까지 연약한 자를 돕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연약함을 담당하는 것에만 신경을 썼지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입니다. 단지 그래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인간도 동물과 다름이 없다는 것,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돕는 다는 것, 연약함을 담당한다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깨닫는다면 다를 것입니다. 분명
성경에서는 그 이유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도와야 하는 이유, 바로 그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2절 말씀입니다.
“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이웃은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입니다. 다시 말해 나보다 더 연약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남을 돕는 것은 선을 이루는 것이고,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가 빠졌습니다. 이미 앞에서 나왔지만, 우리는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1절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여기서 놓친 말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중요합니다. 먼저 1절의‘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이 있고, 그 다음에 ‘2절의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이 따라옵니다. 이것이 비로소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이었습니다. 나보다 약한 자를 돕는 것은 나를 기쁘게 하지 않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의 한 부분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모습’을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합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3절입니다.
“15:3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주께서 만약 자기를 기쁘게 하시려고 하셨다면, 주님 편에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사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편에 서셨고, 주님의 일로 인해, 주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으며, 애매히 비난과 조롱과 매맞음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성공과 부귀와 명예를 위해 사셨다면, 주님은 더 이상 주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하나님을 위해 사셨고, 때로 그 일로 인해 비방당하는
것도, 어떠한 어려움도 다 인내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기쁘게 하려 함으로, 우리의 불편이 가중된다면,
우리의 만족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괴로움을 겪는다면, 우리가 수치를 받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만듭니다.
‘아, 그리스도께서도 이런 수모를 당하셨구나. 나는 지금
그 모든 수모에 동참하는 것이구나!’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모범과 선례를 보여주신 것은 훗날 동일한 고통과 어려움에 처해 있는 우리들을
위함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며 생각하여 해야 할 위로의 일들과 해야 하는 권면의 일들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성경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인내케 하시는 것을 깨달으시겠습니까?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안위케 하심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있음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이전에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아왔던
우리였지만, 그래서 남을 도와주는 것에도 한계를 느끼고 쉽게 포기해 버렸던 우리였지만, 이제 그 한계 상황 속에서 우리의 목적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한계에 다다른 고민 속에서 오히려 더욱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고, 예수님을 닮게 되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현재 우리의 삶의 인내가 되어 주시고, 안위가 되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하나님을 알려주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의 삶 속에서 기쁨과 평강이 충만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어디서 이런 기쁨과 평강의 충만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 근원은 오직 소망의 하나님 뿐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금 새로운 소망으로 넘치게 해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힘들 때마다, 한계에 다다를 때마다 주님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인내와 안위의 우리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저와 여러분들을 불들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