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력] 46고전 1; 18-24 그리스도를 닮게 하심2Loading the player...
46고전 1; 18-24 그리스도를 닮게 하심2_5
2017. 5. 12. 금. 금요철야
*개요: 고린도전서 연구,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는 우리에게 본질적인 교회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교회론을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는 에베소서에 비하면 고린도전서에서는 그 의미가 약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을 음미해보면 더 구체적이고 더 실제적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는 교회 안에서 생겨난 여러가지 문제를 대응하는 해결방법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문제들을 보면 지금의 교회의 문제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한 문제들이 고린도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교회의 본질과 진정한 의미를 말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한번도 교회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또한 고린도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테소스를 연결하는 곳으로 에게해와 아드리아해에 접한 항구도시였습니다. 자연히 상업의 중심지로서 부유한 도시였고 매춘부들로 이루어진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도 있어서 도덕적으로도 타락한 곳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역시 여러가지 세상의 문화와 관습에 영향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의 역사가 오래되고 부모님때로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세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어렸을 때 다니던 교회의 기억이 생생하고 그때에 교회의 모습은 어떠했고 성도들의 모습은 어떠했다는 것이 자세히 기억이 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현재 더 타락하고 더 변질되며 더 부유하고 더 발전된 세상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결국 교회는 결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결코 공통적인 지혜나 경험이나 문화의 총합도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성도일 뿐입니다. 그 성도들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결국 의미를 가지기도 하고 그 의미를 잃어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도 역시 이러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말은 우리 교회에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상황과 형편 속에서 우리도 역시 세상문화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도전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느냐 입니다. 그냥 무시해버리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안전하지 못합니다. 그 도전에 대해서 응전해야만 합니다. 우리 주변의 교회와 성도들이 분열과 분쟁, 복음에 대한 오해, 성령의 계시에 대한 무지, 근친상간, 음란, 소송, 외도, 이혼, 불경건 등등의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응전해야 하겠습니까? 무엇으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 사상적인 침투와 영향력 속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수 있겠습니까? 그 핵심은 바로 가장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깨닫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핵심을 붙들려고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올바르게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가장 균형잡힌 위치에서 넘어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핵심을 오늘 말씀18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말씀은 단순히 십자가의 도가 미련해 보이는가 아니면 지혜로운가를 보여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본질적으로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왜 하나님의 능력인가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해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가장 완벽하고 온전한 구원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진정한 신앙을 원하십니다. 그 누구도 우리의 믿음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 누구도 우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이 혹은 자녀가 혹은 친구가 우리 자신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질을 결단코 숨길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마음을 보여드릴 때에 비로소 주님은 우리를 옳다 인정하시고 주님의 나라로 들어가도록 허락해주십니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도의 핵심은 바로 우리를 대신해서 못박히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바라보게 하면서 그분을 닮게 하면서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놀라우신 능력입니다. 23절입니다.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사도들이 증거한 것은 십자가 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이자 수치스러움였습니다. 또한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야 했는지,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들은 적이 없고 믿지도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더이상 거리끼는 유대인도 아니었고 미련하게 생각하는 이방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혜택을 받는 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한량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게 하셨을까요? 구원을 얻게 하실 때 왜 인간의 노력과 헌신과 열정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구원해주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자 은혜이자 능력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공로나 자랑이 있어서는 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잘 차려놓으신 구원하심이라는 밥상에 인간의 밥숫가락을 올려놓아서는 안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수저만이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 수저는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고 구원이라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수단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인 이유는 바로 그럴 때만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는 어떤 임금님이 그 아들을 위해 베푼 혼인잔치의 비유가 나타납니다. “[마]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임금님은 자신의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에 원래 초청하기로 한 자들을 초청하였으나 그들은 혼인잔치에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알고보니 그들은 임금님의 아들의 결혼을 반대하면서 임금님의 종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군대를 보내어서 그들을 멸하였습니다. 그리고 종들로 하여금 새롭게 사거리 나가서 사람들을 임금님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들이 많이 혼인잔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은 혼인잔치에 어떤 사람들이 왔는가 보려고 잔치자리에 들어왔습니다. “[마]22: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22: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을 보니 그는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예복을 입고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하였지만 그는 ‘잔치’에는 왔으나 ‘혼인’에는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혼인을 위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고 오직 잔치를 즐기려고 할 뿐이었습니다. 임금님은 이렇게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그 사람을 내어 쫓았습니다. 그는 오직 잔치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지 ‘하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혼인잔치’를 준비하는 것이지 ‘잔치’를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를 바라보기만 할 때 세상의 나라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잔치’만을 기대할 때에 우리는 ‘혼인’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분열과 분쟁, 복음에 대한 오해, 성령의 계시에 대한 무지, 근친상간, 음란, 소송, 외도, 이혼, 불경건 등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지금도 여전히 많은 교회들이 그리스도를 닮을 생각을 하지 못할 때 이런 저런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그 문제들을 해결할 열쇠는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일어난 문제를 가리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가 애시당초 생기지 않도록 할 때에 비로소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고자 할 때에 우리가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이자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인간의 지혜로는 이룰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의 지혜로 이루셨습니다. 바로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해 보이는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하셨던 것입니다. 전도의 미련해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라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으니까 인간의 지혜로 하는 것보다 더 훌륭하게 더 놀랍게 구원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따라하는 것이 스스로 발견해서 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효과적이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그리스도를 닮음을 나타내는 성도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분위기나 역사나 문화나 전통이 아니고 자기 시대에서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애쓰며 닮아나가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백마디 말보다 더 명확하고 천마디의 표현보다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분의 몸이고자 할 때 우리는 사변적이 되지 않고 공상적이 되지 않고 현실에 근거하면서 구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됩니다. 또한 그러한 구원의 길은 하나님의 지혜이자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깨달아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도들로 인해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들도 변하여져 가는 귀한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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