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자들에게 있어서 성도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성도는 사역자들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수준과 자질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도들은 사역자들이 바라보는 영광의 대상이요 기쁨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마음으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들에게로 나아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1. 사도 바울이 보는 성도들의 의미
2. 성도들이 알아야 하는 성도의 개념
3. 올바른 성도관이 가져다 주는 인내와 열심
4. 인내와 열심으로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부러움을 금치 못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훌륭한 교역자들을 보면서 존경하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성도들을 그렇게 잘 양육하고 성장하게 한 교역자를 볼 때 한번 더 놀라게 되고, 또한 위대한 교역자들을 보면서 그분들을 섬기고 있는 성도들을 볼 때 역시 놀라게 됩니다. 성도나 교역자나 서로에게 전혀 상관없는 자들이 아니라 다 서로서로 유익과 나눔과 성숙과 성장을 주고 받으며 그 교역자에 그 성도, 그 성도에 그 교역자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사도 바울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훌륭하였고 사도 바울이 위대했던 것처럼 그들의 관계 역시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그중에서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어떻게 생각했는가가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그는 성도들을 가리켜 20절에서‘자신들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도들에게 그토록 애정을 기울이고 관심과 열정을 쏟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성도관입니다. 우리가 성도가 누군가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면 성도와 교역자간의 올바른 관계가 형성이 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정의해 봅니다. 교역자에게 있어서 성도는 어떤 존재입니까? 19절에 보면 이렇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성도는 교역자의 소망이자 기쁨이고 자랑의 면류관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그 영광스러운 모습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성도는 교역자와 별 다른 관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교역자는 교역자고 성도는 성도라서 모든 문제와 고민과 걱정은 각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알아서 해결합니다. 때로는 그렇게 알아서 떠나갑니다. 다른 교역자를 만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지금 교역자와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았는데 다음번 교역자라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것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딜 가도 매한가지인 것입니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 있다면 더욱 새로운 교역자와 만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러니 바로 지금 우리 자신이 교역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친밀한 관계를 사탄은 싫어합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처럼 사탄은 계속 그런 관계를 막습니다. 그러다 보면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그냥 스스로 결정을 내려버립니다. 죄를 저지르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며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도가 누군가를 기억하십시오. 성도는 교역자의 소망이요 기쁨이며 자랑의 면류관입니다. 성도의 성숙함이 교역자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어느 교역자가 성도의 망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이러한 깨달음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갖게 만듭니다. 교역자는 성도에게 성도는 교역자에게 가까이 나아갈 때에 비로소 이런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러니 얼굴이 떠나 있어도 마음은 동행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애를 쓰는 것입니다. 전화를 하고 심방을 하고 따로 만나고 식사를 하고… 이 모든 것이 신앙의 유익과 결실을 위해 이루어집니다. 앞으로 교역자에게 더욱 마음문을 열고 친밀한 관계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그로써 가장 유익을 얻고 영광을 얻을 사람은 바로 성도 그 자신입니다. 주저하지 않고 나아가 하나님의 귀한 면류관이 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