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2: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출] 2:12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출] 2: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그른 자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출] 2:14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출] 2: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출] 2: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 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
[출] 2: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무리에게 먹이니라
모세는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킨
하나님의 지도자입니다. 그는 장정만 6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가 이동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어 효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데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한 사람입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 많은 사람들이 그 힘든 이동을 잘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불평하는 사람들과 거역하는 사람들, 그리고 대항하는 사람들을 그는
잘 이끌어서 목적지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때로는 위협도 당하고 괴로움도 많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그 모든 일을 잘 끝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역시 연약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그가 어떻게 앞으로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을지 의아하게 생각되던 때였습니다. 모든 면에서 어리숙하고 성급하며 격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큰 일을 맡을 수 있는 자로 준비시키셨습니다. 그 일이 너무나 크고 중요한 일이었기에 그가 받은 훈련 또한 특별하고 길었습니다. 40년간의 지도자 생활을 위해서 40년간을 훈련받았습니다. 애굽에서 사람을 죽이고 도망친 뒤에 보냈던 40년의 세월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연단과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그가 큰 지도자로 훈련을 통해서 거듭나기는
했지만 분명 그에게는 연약한 부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은 단지 지도자로 세움을 받게 될
모세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모세가 취약했던 부분은
바로 우리들도 취약한 부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그 부분에 성숙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그부분에 훈련되지 않는다면 동일한 훈련과 어려움에 다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가 약했던 부분은 분노였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의 내면에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될 때 그러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또한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지 못할 때 분노가 외부로 폭발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우리는 성경이 보여주는 한 장면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발견을 통해서 우리들은 모세의 분노와 그가 추구했던 자기 자신의 역할에 집착하는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초라해 보이는지 보십시오. 스스로 권위를 취하려고 하고 스스로 상황을 장악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가련한지 보십시오.
"2: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2:12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모세가 왜 애굽사람을 죽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애굽사람은 자기 형제인 히브리 사람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미 자라면서 자신이 히브리인이며 그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가 유모로서 자신을 키우게 되었기 때문에 그 과정 중에서 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애국심과 민족애를 가지고 있었던 모세는 자기 동족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뒤 그는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 감추어 버렸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단지 동족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기
때문 만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에게 맞고 있던 동족을 구해내기 위해서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같은 히브리인 조차도 모르게 그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 날 다른 히브리인이 싸우는 것을 말리다가 그 히브리인이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였다고 하자
그제서야 자신이 한 일이 탄로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말 아무도 모를 줄 알았던 것입니다. 아니면 현장에 있던 히브리인 앞에서 애굽사람을 죽이고 그 히브리인과 이 사실을 비밀로 하자고 약속했다 할지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히브리인을 구원해 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애굽사람에게 분노를 표출한 것입니다. 그를 죽이기까지 말입니다.
같은 민족을 괴롭힌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그러한 과격한
모습은 같은 동족에게조차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마치 조금만 잘못하면 죽여버리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동족끼리 싸우는 모습을 모세가 보고 말렸을 때에 그 만류를 받은 히브리인이 모세에게 말합니다.
“[출] 2:14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모세가 분노를 터트린 것은 분명합니다. 그 분노는 사람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또한 생면부지의 애굽사람에게
분노를 한 이유도 명확합니다. 자기 민족을 괴롭히고 때렸기 때문입니다.
늘 모세에게는 핍박받는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핍박하는 애굽인들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침 그 때 조건과 상황이 이루어졌을 때에 분노의 표출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가 애굽 사람에게 분노하면서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민족의 해방일까요? 애굽 사람들에 대한 저항일까요? 그보다도 그의 마음을 더 사로잡은 것은 자기가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히브리 사람을 구원해 내기
위해서, 그리고 애굽 사람을 멸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그는 결국 살인자가 되었고 광야로 도망가야만 했습니다.
모세의 연약함이 우리 가운데서 나타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우리 뜻대로 뭔가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분노를 터트리지는 않습니까? 때로는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만들기 위해 큰 소리나 위협이나 댓가를 치르게 함이나 처벌을 내리지는 않습니까? 내
맘대로 조절이 되지 않는다고 상황과 사람과 형편에 대해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때로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 되지는 않습니까? 절단과 절교와 배반과 공격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도 모세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가정안에서
식구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주변의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단지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하는 지도자는 그래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분에서 모세는 철저히 훈련받았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가 인도된 곳은 광야의 우물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였습니다.
“[출] 2: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출] 2: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 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
그곳에서 그는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었고
그냥 외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곳에서 가장 해야만
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출] 2: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무리에게 먹이니라”
그럴 때 그는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돕는 삶을 살 수 있었고
그렇게 가게된 광야에서 자신의 분노함을 온유함으로 바꾸는 변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죽일 사람도 없는 광야에서 죽일 수 없는 양들과 씨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성품은 온화하고 온유하게 변화되었습니다. 결국에는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사람을 죽이던 자였지만 사람을 살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분노를
못참는 자였지만 분노를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변화시켜주실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황과 환경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 인도하심을 잘 감당할 때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들어 세워주실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모난 부분에 연단받지 말고 성숙해져서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되시고 주변 사람들을 살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