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가 어떠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별로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늙어서는 다른 사람에 의해 이끌리게 될 것이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순교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순교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베드로는 적지 않게 낙심이 되었습니다. 왜 자신은 그렇게 생애를 마감해야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두렵기도 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이 베드로에게는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어떻게 죽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임을 깨달았을 때 그 뜻이 이해되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에서 죽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주님을 따르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서 십자가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우리는 순순히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까요? 그것이 어떤 괴로움과 고달픔을 수반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정말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아마 알고서는 이런 삶을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습니다. 모르고 겪는 것이 자세히 알고 고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일입니다. 앞으로 당할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든지 알지 못하든지 우리의 선택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진정한 선택은 고통을 당할 것인가 피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주님을 따를 것인가 따르지 않을 것인가입니다.
이제 우리가 힘들고 고달프고 어려운 것만을 생각한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뒤로 물러나 절망과 좌절에 빠지게 될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바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대로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 나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비록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끌려 갔지만 그 전에는 자기가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닐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자신의 평안과 유익을 생각할 때 적지않은 위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주신 축복과 분복이 있습니다. 그것을 감사하게 여기면서 힘들더라도 더욱 주님을 따라 나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본문 중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다른 사람인 요한이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자신은 그 일이 힘들지 모르지만 그가 죽을 힘을 다해서 주님을 따라간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은 분명하였고 구체적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의 미래에 대해서 알려주신 이유는 두려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인도하심을 확신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앞으로 당하게 될 모든 고난 속에서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 속에서 주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따르라는 것을 특별히 주문하고 계십니다.
더욱 주님을 따라가는 것만이 이 모든 고난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임을 잊지말고 온전히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