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일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볼 때 참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참으로 게으르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열심히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보기에 좋습니다. 하지만 대충 대충 하는 사람들은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불충성한 사람들로 인해서 우리가 손해를 보고 불편을 당한다면 우리는 더욱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화를 낼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충성을 요구합니다. 뇌물을 받은 검사에 대해서, 사적인 견해로 판단을 내리는 판사에 대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는 공무원에 대해서, 돈을 해외로 빼돌리는 사업가에 대해서, 심지어는 제때 문을 열지 않는 가게에 대해서도 우리는 충성을 요구하고 그러지 않을 때에 비난합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충성이 없어도 될 수 있는 인간 사회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충성이 있어야 인간도 기업도 나라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충성하지 않으면 결국은 멸망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지 멸망을 두려워해서라기 보다는 더 실제적으로 충성을 하지 않으면 비난을 받고 질책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충성을 합니다. 또한 충성을 하면 칭찬을 받고 유익을 얻기 때문에 역시 충성을 합니다. 충성이라는 덕목은 이와같은 포상과 벌칙에 의해서 완성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충성을 합니다. 개가 충성을 하는 것 처럼, 돌고래가 충성을 하는 것처럼, 새가 충성을 하는 것처럼 우리도 충성을 합니다.
하지만 상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계속해서 충성을 할 수 있을까요? 상도 없고 벌도 없는데 계속해서 어떤 일에 충성을 할 수 있을까요? 혹은 있기는 하지만 나중에 상이 있고 나중에 벌이 있다면 지금 당장은 충성할 수 있을까요? 충성이라는 덕목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자극이 빨리 주어지지 않을 때 과연 우리는 충성할 수 있을까요? 아마 이런 부분에서 우리는 회의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도 시키지 않는데 열심히 하기란 어렵습니다. 또한 제때 상벌이 주어지지 않는데 지속해서 무엇인가를 하기란 힘든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좀 달랐습니다. 그는 지속해서 충성하고 있습니다. 상벌이 즉각적으로 오는 것도 아닌데 충성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다른 사람을 충성하게 하는데에도 충성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충성을 기반으로 해서 다른 사람까지도 충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12절과 13절을 보십시오.
“ 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그는 자기가 고난을 받으면서까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까지 자신이 부끄러워하지 않음과 충성함을 따라서 그 복음을 본받아 지키라고 말하였습니다. 자신이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다른 사람에게까지 하게 한다는 것은 실제로 그가 그러한 삶을 살았고 그 일에 온전히 충성하였음을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만 하게 한다든가 아니면 자기만 한다든가 하면 그것은 반만 충성하는 것이지만 자기도 하고 다른 사람도 하게 하며, 다른 사람도 하게 하면서 자기도 한다는 것은 온전한 충성을 의미합니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2. 그 이유는 그에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렇게 충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이일을 행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확신’이었습니다. ‘소망’이었습니다. 그에게 그러한 확신과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온전히 ‘충성’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충분한 에너지가 있으니까 그것이 행동으로 충분하게 발산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던 확신과 소망을 보십시오. 그것이 무엇에 대한 확신이자 소망입니까?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그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확신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고 자신을 확신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사명을 맡겨주셨음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의탁하신 것을 또한 그분이 지켜주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의 소망과 확신은 온전히 하나님께 향했던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우리가 어떻게 신뢰를 찾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하다못해 우리는 평생을 주의 일에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합니다. 우리는 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계획과 의지를 가지고 한 것은 다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해서 한 것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려고 하면 망하지만 하나님께 의지하려고 하면 승리합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망하지만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일을 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복음전파를 말씀해주셨고 그는 그 일에 순종하였으며 그로 인해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일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립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의지하고 확신하며 소망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은 스스로 계획과 능력으로 모든 일을 이루셨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하나님을 통해서 자신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빌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시도가 어리석으며 하나님은 그렇게 이용당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통해 사람의 일을 하고자 할 때에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상반된 입장에서 누가 이길 수 있을까요? 사람은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고 하나님은 사람을 이용하고자 하는데 누가 옳은 것일까요?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정말 사람이 필요하신 것일까요? 사람이 없으면 그 일을 이루시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모든 일을 이루셨습니다. 9절, 10절을 보십시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와 혹은 도움과 전혀 상관없이 자기의 뜻과 은혜대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일에 하나님 자신의 희생과 충성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구 아무런 도움없이 그 일을 이루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에서는 예언만 되어 있었지 실제로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심으로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부활하셨고 인간들도 그분을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통해서 어떻게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썩지 아니할 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신 은혜이며 일방적이고 의지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결국을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이 놀라우신 사랑을 나타내시고 높여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는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우리를 높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이 이런 것이라면 인간이 하나님을 통해서 인간의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 어떻게 정당한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어떻게 가능한 일이 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통해 인간의 일을 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이 사도 바울에게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그를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후에 복음을 전파하고 그 전파된 복음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그 구원의 기쁨과 고마움을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 구원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려는데 그 일에 충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사명의 이유이자 은혜의 내용이며 우리가 가져야 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불러 하나님의 나라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세워주신 것처럼 주님은 우리를 세워주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한 가지 일로만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반포자요 사도요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세우심을 받고 있습니까? 전도자요 봉사자요 예배자요 기도자요 말씀연구자요 교인이요 성도요 직분자요 임직자요 종으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까? 이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은혜를 힘입어 우리는 주의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4. 우리에게도 그러한 결심이 있다면 하나님의 부르신 일에 충성해야 한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은 디모데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사도 바울에게 반포자요 사도요 교사의 직분은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아름다운 직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충성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직분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그 본분에 충성해야 합니다. 교인으로 성도로 직분자로 임직자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일을 지켜내야 합니다. 또한 전도자로 봉사자로 예배자로 말씀을 연구하는 자로 기도하는 자로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 내에도 충성하는 자가 있고 불충성하는 자가 있습니다. 충성하는 자들을 보며 우리는 그들을 칭찬합니다. 충성하는 자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충성스러운 도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립니다. 그 일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불평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나무랄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충성하지 않는 다른 교회들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충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외면하지 말고 반드시 이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할 사람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혼자서라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힘을 주셨습니다. 그 힘을 의지해야 하나님 앞에 충성합시다. 이러한 충성으로 우리가 받은 은혜를 온전히 이루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개요
1.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지키고 그 일에 충성하였다.
2. 그 이유는 그에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은 스스로 계획과 능력으로 모든 일을 이루셨다.
4. 우리에게도 그러한 결심이 있다면 하나님의 부르신 일에 충성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