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을 무사히 떠나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온 이스라엘은 호렙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이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고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것은 다수 대 하나님과의 언약이었으며 민족 대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벌을 받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며,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의 그들의 심판자가 되시고 그들의 하나님의 대적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언약에 대해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분명히 알게 하셨고 그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한 마음이 되어 그 언약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그 백성 안에 있는 한 그들은 모두 이 언약의 대상이었고 수혜자이었으며 동시에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분명한 호렙산 혹은 시내산 언약을 통해 그들은 결코 파기할 수 없는 언약의 당사자들이 되었고 하나님과의 분명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언약 안에만 있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사는 하나님의 친백성인 사람들이 될 수 있었고 만약 그 언약을 떠나면 그들은 비참한 상태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내산 언약의 구도를 잘 살펴보면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 그들의 삶 속에는 중요한 선택의 문제가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쪽 극단에는 가장 하나님과 연합되고 복을 받는 좋은 선택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가장 악하고 커다란 심판을 받는 나쁜 선택이 있습니다. 이 선택 속에서 그들은 선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악을 택할 것이냐를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언약을 따르고 지킬 것이냐 아니면 언약을 파기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질 것이냐가 그들의 삶 속에 생겨난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언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언약입니다. 그 언약에서 아담과 하와는 모두 언약의 당사자가 되었습니다. 아담만 선악과를 따 먹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하와도 역시 선악과를 따먹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언약의 수혜자이기 때문에 언약을 통해 유익을 얻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동시에 언약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였던 것입니다. 하와는 자신이 하나님과 직접 언약을 맺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에덴동산에 거하고 있고 생명나무와 선악과에 접근할 수 있는 자였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언약의 당사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담을 통해 그가 언약의 당사자로서 하와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녀가 악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돌볼 책임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담이 모든 것을 다스려야 하는 책임을 맡았던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다른 사람도 선을 행하게 하는 위치에 있어야만 했지만 그 위치에서 벗어났습니다.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는 동안 아담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 짧은 순간에 아담은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게 하는 위치에서 벗어나버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하와는 죄악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더 이상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악을 행하는 영역으로 들어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와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려 버렸습니다. 인간의 최초의 범죄함이 시작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비극은 계속되었습니다. 하와가 자신만 범죄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아담까지 함께 그 범죄에 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모두 죄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인류의 시작이 아담과 하와였고 인간은 오직 그들 뿐이었는데 그들은 아무런 고민 없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해서는 안되는 악의 참여자가 되었고 악의 주장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첫 번째 언약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첫 번째 언약에서 인간이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늘 언약을 생각하게 되면 이러한 구도가 생겨납니다. 언약이 없다면 몰라도 언약을 맺는다면 자연히 그 언약을 지킬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이 있다면 당연히 그 언약이 깨지는 상황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항상 그 언약이 지켜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 언약을 지키시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것은 항상 태초이래로 있어 왔던 일입니다. 하나님은 심지어는 그 언약이 깨어지는 순간에도 그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언약이 깨어져서 인간에게 벌을 내리셔야만 할 때에도 언약을 무효화하고 벌을 내리시지 않거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처벌은 언약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언약을 깨뜨리지 않는한 반드시 내려야 했고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처벌도 지키셨던 것입니다. 다만 그 대상을 인간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한번도 그 언약을 어기신 적이 없습니다.
늘 언약은 인간에 의해서 깨어집니다. 인간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언약을 무효화합니다. 혹은 무시합니다. 그러나 맺은 언약을 무효할 수는 없기 때문에 늘 그 언약의 파기로 인해 처벌을 받을 뿐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나타나기 전까지의 일이었습니다.
항상 인간은 그렇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면서도 다시한번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또 다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그들을 자신의 문제 속에서 구원해 내시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약을 맺어주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그들은 혹시 이 언약을 맺을 때 조금 주저하지는 않았을까요? 만약 이 언약을 맺게 되면 그들은 꼼짝 못하고 하나님만 믿고 따라야 하는데, 다른 신도 믿고 싶고 다른 종교도 갖고 싶고 할 때 그랬다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파기로 인한 처벌을 받게 될 텐데, 좀더 자유롭게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마음대로 한다는 것을 불가능하게 되는데, 그것 때문에 선뜻 언약을 맺기를 싫어하지는 않았을까요?
만약 그런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다면 주님이 해주신 이 말이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을 맺기 전 그들은 자유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애굽땅 종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애굽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애굽의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 동원된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계속 그곳에 살았다면 평생 종들로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형편과 상황을 아시고 놀라운 능력과 권세로 그들의 쇠사슬을 끊고 그들의 올무를 풀어 자유케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준비를 통해 비로소 시내산 광야에 그들을 인도하셨고 거기서 정식으로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과 맺는 언약은 자신의 축복이었고 그로인해서 자신들이 더욱 보호받으며 특별한 백성이 되는 중요한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그 언약은 과거 하나님이 알고 계시던 그들의 선조들과 맺는 언약이 아니었습니다. 그 언약은 현재 시내산 호렙산 광야에 서서 언약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는 언약이었습니다. 그 백성은 전쟁을 치룰 수 있는 남성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여성과 어린이들과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곳에 서있는 모두가 받는 현재적이고 실제적인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그러므로 그 언약은 과거 언약의 갱신이 아니었고 연장도 아니었으며 새롭게 애굽을 떠나 광야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으시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들 모두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사 하나님의 친백성으로 삼아주심이었습니다.
그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언약을 주님은 다시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를 말씀 앞에 세우시고 하나님 앞에 세우시고 보좌 앞에 세우셔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죄악 가운데서 살았던 우리들을, 구원받지 못하고 사탄과 함께 심판받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구원하여 내신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죄와 더불어 살면서 그 죄성의 올무에 묶여 어쩔 수 없이 번번이 죄를 짓곤 하던 우리들을 자유하게 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면서 결국에는 무의미한 인생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에게 하늘의 소망과 능력으로 채워주신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와 더불어 언약을 맺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안에 거하면서 더 많은 열매를 얻기를 원하십니다. 언약속에서 우리를 계속 보호하시며 이끌어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언약의 책임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언약의 유익과 능력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능력은 항상 우리를 도우시며 이끌어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자 언약인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언약의 중요성과 귀한 의미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다시한번 중요한 선택에 놓이게 됩니다. 그것은 어떠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떠한 수준에서 지킬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악은 행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선도 행하지 않는 선택이 있습니다. 중립적인 위치에서 나쁜 일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선한 일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잘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나쁘다고도 볼 수 없는 이러한 애매한 위치에 있다면 하나님과의 언약은 깨어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언약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이것을 경계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이제 우리는 단지 그 규례와 법도를 어기지는 않는 수준에서 좀더 나아가서 그것을 능동적으로 듣고자 하며 배우고자 하고 지켜 행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언약에 대해서 우리의 진심과 성심을 나타낼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방향으로 가지 않고 중립적인 위치에서 애매하게 있다가 오히려 악으로 빠지게 되는 경우를 경험합니다. 어차피 중립이란 오래 유지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립은 악에서 선으로 가고자 할 때의 그 중간적인 과정이거나 혹은 선에서 악으로 갈 때의 중간과정일 뿐입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악이든 혹은 선이든 한 쪽에 가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열심을 다해 선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나아가고자 할 때 우리는 ‘경건’할 수 있습니다. 경건을 훈련하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규례와 법도가 무엇인지 듣고 배우고 행하지 않으면 결코 선이 무엇이며 악이 무엇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 있을 때만이 우리는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해주셨는지를 기억할 때에 사탄의 거짓말에 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선을 단지 나 혼자서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선을 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특별히 시킨 일은 아니지만 선을 주도하고 이끄는 자가 되는 것이기에 가장 선한 것입니다. 가장 선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선입니다. 하라고 해서 하는 것도 선이지만 그것보다 더 선한 것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선을 하나님은 축복해주십니다. 더욱 더 많은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예를 들어, 다윗은 혼자서 가만히 묵상하다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동기는 단순했습니다. 자신은 좋은 집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전은 여전히 성막으로 존재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간구를 하나님께 드렸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놀랍게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얻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크게 축복하신 이유는 그가 스스로 생각해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모습이 너무나 기특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의 주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선의 주도자가 되기 위해 나가야 합니다. 단지 수동적으로 시키는 일만 하는 것보다 스스로 알아서 하나님의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런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충성’이라는 실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충성할 때에 하나님은 그 언약 가운데서 더 많은 은혜와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 언약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거역하여 언약의 처벌을 받게 될 지 아니면 순종하여 그 언약의 수혜자가 될 지는 우리가 결정해야 합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주의 언약으로 인해 복을 받게 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더 나아가 그 언약을 통해 더 큰 언약으로 더 큰 능력으로 나아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더 많은 은혜와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얻는 것은 주님을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애쓰는 모습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뜻가운데 넉넉하게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운데 이렇게 주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누리는 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힘차게 살아가는 우리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