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능력] 8룻 1; 1-13 나오미의 슬픔의 이유2Loading the player...
8룻 1; 1-13 나오미의 슬픔의 이유2_4
2018. 8. 15. 수. 수요예배
*개요: 룻기연구 [룻]1: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룻]1: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룻]1: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룻]1: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룻]1: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룻]1: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룻]1: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룻]1: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이 세상에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보다 더 비참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해도 고생해도 역경이 있어도 소망이 있는 사람은 다시 새롭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망이 없는 사람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닙니다. 숨은 쉬고 있을지 몰라도 머리는 멈춰 있습니다. 그리고 소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더욱 비참한 상태로 빠져들어 갑니다.
그래서 소망을 갖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이지만 이 세상의 일은 때때로 소망을 가지고 싶어도 가지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 소망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 상태가 될 때 우리는 완전히 절망하고 기진맥진해서 탈진하고 맙니다. 그리고 소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오미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절망으로 탈진했고 소망을 잃어버려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그에겐 아무런 소망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기대고 의지할 것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근을 피해 모압 땅으로 건너온 지 십년 만에 남편이 죽고 큰 아들이 죽고 또 작은 아들이 죽었습니다.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건만 아무 재산도 없고 그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건 자식도 없고 달랑 두 이방 며느리 뿐이었습니다. 나오미의 슬픔은 얼마나 큰 것이었겠습니까? 도대체 인간이 얼마나 더 비참해 질 수 있겠습니까?
이제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도 살기가 힘들어 졌습니다. 오히려 떠나왔던 유대 땅이 먹고 살 만 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오미는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면서 며느리들을 다시 살던 모압으로 돌려보내고자 하였습니다. 나오미가 며느리들을 귀찮아서 보내버리는 것입니까? 자신이 당한 슬픔으로 인해 이젠 아예 사람들조차 보기 싫어진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함께 살면서 서로를 위로해가며 살지 않고 한사코 며느리들을 보내려고 하는 나오미의 이유는 사실은 그녀에게서 모든 소망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룻]1: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룻]1: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룻]1: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그녀는 소망을 잃어버린 자입니다. 그래서 며느리들을 자기를 위해 붙잡아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자유롭게 하여 다시 새로운 삶을 찾도록 하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녀가 소망을 잃어버린 이유는 단지 남편이 죽고 아들들이 죽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말 그녀가 완전히 탈진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절망에 빠진 이유는 하나님이 더 이상 그녀의 편이 되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불행의 이유, 모든 슬픔의 원인에 바로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벌 주시는데 하나님이 내게 재앙을 주시는 데에야 내가 어떻게 소망을 갖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입니다.
재앙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면 내가 회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슬픔의 이유가 다른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서 떠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괴로움의 이유가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나를 치시는 데에야 내가 어찌 그 손에서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소망이나 희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비참하고 참담한 마음으로 이렇게 며느리들을 돌려보내야만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저히 소망이란 찾을 수 없었고 그저 죽지 못해 사는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나오미를 이렇게 치셨을까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의 죄 때문입니까? 그녀가 뭔가 잘못한 일을 했습니까? 그녀에게 특별한 시험을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무슨 다른 계획을 가지고 이렇게 한 인간을 이처럼 비참하게 만드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섭리는 왜 이렇게 인간을 힘들게 만드는 것입니까? 나오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비참한 상황 속에서 그렇게 어려움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습니다. “[고후]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은 자신의 고통 중에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절망과 낙심으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이 된 이유는 바로 그런 죽은 상태에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대개 이 정도 되면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으면 죽어버리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완전히 몸과 마음이 다 죽어버렸는데.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죽이시는 이유는 그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보이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완전히 죽어 살 소망이 완전히 끊어지고 나는 죽었다는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고 나서야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비로소 등장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오미가 완전히 모든 소망을 다 잃어버리고 죽지못해 사는 극한까지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깨달았던 절망의 의미이며 예수님이 나사로를 통해 보여주시는 부활의 능력이며 나오미가 깨달아야만 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고 이 순간 이 말씀을 듣는 우리가 느껴야만 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불러다 놓고 말합니다. “[룻]1: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룻]1: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모압 땅에서 얻은 두 자부 오르바와 룻에게 나오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단지 그들을 자유롭게 해 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복을 빌어주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단지 나오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뿐이었고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나오미의 마음은 찢어지도록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며느리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소망을 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소망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에게도 하나님의 소망이 필요했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소망을 룻을 통해서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나오미가 하나님의 소망을 발견해 나가는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 일을 통해 취하시는 놀라운 영광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이제 우리가 보았던 고린도후서에서 나타난 바울을 깨달음을 보여주는 다음 절을 보고 마치려고 합니다. “[고후]1: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나오미의 인생은 그냥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나오미를 건지셨습니다. 그리고 나오미를 건지신 것처럼 사도 바울을 건지신 것처럼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건짐을 받기를 바랍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능력이 오늘 죽은 자 같이 된 우리 모두에게 놀랍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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