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찌니라 하시매
6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하라 하고
7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 행할찌니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을 나왔을 때 그들은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로의
고집을 꺾으셨고 또한 어떻게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는지를 경험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은 개개인들에게만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만남과 그와의 관계 속에서 일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때에 하나님의 모습은 전세계적이셨습니다. 또한 전우주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강과 물과 개구리나 메뚜기 등을 움직여서 재앙을 일으키셨고, 온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움직이셔서 재앙을 만드셨습니다. 결국 바로가 모세와 이스라엘을 내보낼 때 그는 모세가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두려우신 능력을 만났기 때문에 내어보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의 위엄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잃고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을 내어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우여곡절끝에 마침내 가나안에 이르렀습니다. 직진하면 몇달 안걸릴 길을 그들은 40년이 넘게 걸려 도달하였습니다. 그동안 모세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고, 출애굽했던 세대는 모두 죽고 출애굽한 이후에 광야에서 살면서 태어난 자녀들이
주된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모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해야만 했습니다. 40여년간 광야생활을 하면서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으로의 이주는 필연적인 목표였습니다. 이러한 중차대한 사명을 안고 지도자의 자리에 선 여호수아에게 가나안을 정복하려고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상황’을 넘어서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올려다 보아야 하는 때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사람때문에 하나님을 올려다 보아야 할
때가 있고, 사건때문에 하나님을 올려다 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막막할
때 답답할 때 하늘을 쳐다보고 싶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사람마다 스트레스를 대처하는 방식은
다 다릅니다. 힘들고 괴로울 때 TV를 트는 사람도 있고, 핸드폰을 꺼내 게임을 하는 사람도 있고,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뭔가
답답하고 막히고 괴로울 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을 돕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그 시간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시간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괴로움의 시간이지만 하나님께 있어서는 능력의 시간인 것입니다. 본문의 1절이 바로 그러한 시간을 보여줍니다.
“1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여리고
성은 이미 이스라엘 자손들의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처음 애굽을 나올 때 홍해를 어떻게
건넜는가 하는 것은 여리고 사람들을 기절할 만큼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를 그냥 걸어서
건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바람으로 가르시고 가운데 길을 만드셨고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그 바다를 그냥 걸어서 건넜습니다. 이 사실이 이미 여리고 사람들에게 엄청난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그 장면이 여호수아 2장 10절에
나옵니다.
“수2:10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2:11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여리고
사람이었던 라합이 전해준 이말은 여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사로잡혔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까지 걸어서 건넜을 때 극도로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앞에 당도했을 때에 그들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수비형태로 전환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버티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굳건히 성을 지키고 있는 여리고 사람들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응책이 전무했습니다. 흔히 말하면 공성전을 시작해야 하는데 필요한 장비도 없고 이런 전쟁을 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또한 식량이나 근거지가 충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과연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지 난감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보면 우리들은 홍해를 가르고 애굽을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습니다. 또한
메추라기와 만나로 먹이심을 받은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때 당면한 어려움들을 이기게 하시는
것은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대해서 승리를 거두게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은혜를 입고 도우심을 받고 문제를 해결한다 하더라도 또 다시 새롭게 등장하는 어려움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원점으로 돌려버리는 듯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우리의 은혜받음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부러워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런 일들 속에서 또 다른 어려움 하나만 생기면 다시 힘들어하고 괴로워합니다.
어쩌면
여호수아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홍해를 건너고 시혼와 옥을 이기고 요단강을 건너면 뭐합니까? 지금 대면한 여리고 성은 굳게 닫혀 있으니 이 성을 무슨 재주로 열며 어떤 방식을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러한 절망과 고민이 바로 우리 삶 속에서 있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방금 언급했듯이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 의지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대상을 의지한다면 하나님을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다른 대상을 동시에 잡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잡든지 아니면 그 대상을 잡든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또한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을 잡든지 TV를 잡든지 선택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잡든지 아니면 술이나 담배나 취미생활이나 여가활동이나 그 어떤 것을 잡게 됩니다. 하나님도 잡으면서 다른 것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잡는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여호수아는 그 선택 속에서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2절입니다.
“2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3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붙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성을 매일 한번씩 돌아서 엿새 동안을 돌고 일곱째 날에는 성을 일곱번 돌고 그 다음에 나팔을 불고
온백성이 크게 소리를 지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알려주신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지금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막상 현실에서 이런 방법을 받게
되면 사실 당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비상식적이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상황이기는 하지만 굳게 닫혀진 성벽이라서 공격을 못할 정도라면 상당한 규모를 가진 건축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한
성벽을 온백성이 몇 바퀴를 도는 정도의 일과 그 다음에 소리를 지르는 정도의 방법으로 어떻게 무너뜨릴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지금 현재 성문을 굳게 잠그고 나아오지 않는 적들을 끄집어 내기 위한 좀더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로 할 때에 어떻게 아무 계획없이 그저 성만을 빙빙 돌고 있겠습니까? 현실의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이 이런 식으로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우리의 취향과 다르고 우리의 계획과 다를 때 과연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인가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따랐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렇게 무작정 기다리며 아무 계획도 없이 하라는
대로 묵묵히 진행하는 것은 어리석게 보일 수 있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순종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아까 여리고 성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두려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두려워했던 일들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과거에 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다 알려 주셨고 그대로 행할 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때에 맞춰 요단강이
상류에서 쌓여서 그치게 하셨고 그렇게 물이 끊어지자 사람들은 요단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으며 살았고 그들의 옷이 닳거나 헤어지지 않았으며, 애굽을
나올 때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홍해를 건너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당시의 모든 형편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놀라운 민족의 대이동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이번에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었습니다. 원래 여호수아는 그렇게 살아왔었습니다. 그런 삶을 늘 보며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번 여리고
전쟁때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대로 사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에 하나님의 뜻이 일어날 줄을 믿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에게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5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찌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벽은 저절로 무너져 내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벽에 손도 대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제사장의 양각나팔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심이 선포될 때에 그들은 큰 소리로
외쳐 찬양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그저 찬양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행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일을 그대로 행했습니다.
“6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하라 하고
7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 행할찌니라”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입니까? 그들은 전쟁을 하고 있었지만 전쟁을 하는 것 같지 않게 오히려 찬양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할 것을 준비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는 고비에 서서 어떻게 적을 쓰러뜨리고 어떻게 적을 물리치느냐를
고민해야 할 것 같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이 한 고민은 어떻게 하면 언약궤를 잘 멜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양각나팔을 잘 불 수 있을 까, 어떻게 하면 시키는
대로 성을 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여호와의 궤를 잘 지킬 수 있을까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현재 닥친 문제가 우리 인생의 전부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이외에는 없다고 생각한다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해보는 대로 해보고 또해보다가 안되면 그냥 포기해 버릴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허무함입니다.
그렇지만
그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전쟁하는 사람들이 싸우지 않고 걷게
하십니다. 전쟁하는 사람들이 칼을 들지 않고 노래하게 하십니다. 전쟁하는
사람들이 성을 오르지 않고 소리 높여 함성을 지르게 하십니다. 전쟁하는 사람들이 힘써 언약궤를 지키게
하십니다.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이 하나님을 붙들었을 때 하나님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등장하시는 시간,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시간, 마법같은 능력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20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그때까지
정말로 여리고 성이 무너질까라고 생각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스라엘과 여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성벽이 무너짐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벽에 손하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성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이일을 하신 이유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전히 하나님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열심히 집중하는 동안에,
그동안의 답답한 상황이자 풀 수 없을 것 같은 문제였던 그 굳건한 성벽이 무너져 내렸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상황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뜻을 묵묵히 따른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여리고 성을 일곱번 돌라는 하나님의 뜻은 여리고 성을 빨리 정복하고자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답답한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속에 담긴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려고 하는 깊은 뜻과 은혜로우신 계획을
바라보면 그말씀이 전혀 헛된 것이 아니라 정말 실제적인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현재의 삶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막연히 기다려야만 하거나 혹은 담담히 할일만 하는 삶이 여리고성을 빙빙 도는 것과 같아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놀라운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처럼 말입니다.
굳게 닫힌
여리고 성문처럼 답답한 모든 문제 앞에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그 계획을 붙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시간이 되었을 때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모든 문제들과 모든 고민들과 저절로 해결되는 모든 형통의 시간들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을 온전히 붙들었던 여호수아에게 놀라운 승리의
기쁨이 넘쳤던 것처럼,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쳐다보고 우러러 보며 묵묵히 성을 도는 것처럼 신앙의
훈련을 쌓아 갈때에 바로 여러분에게 그러한 승리의 감격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우리의 삶속에 풍성하게 성취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