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원활] 48갈 3; 10-14 저주 아래에 있는 자 믿음으로 사는 자2
48갈 3; 10-14 저주 아래에 있는 자 믿음으로 사는 자2_5
2020. 3. 6. 금. 금요철야
*개요: 갈라디아서 연구 [갈]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갈]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죄와 허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둘은 사전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실제로는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허물이던 죄이던 해야하는 일이지만 하지 않은 것이던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한 것인데 한 것이던 그것이 무엇이든지 샅샅이 들추어내고 그 부분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죄와 허물은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나쁜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때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에서 스스로 무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해야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측면을 살펴볼 때에 비로소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 죄를 알고 나면 그제서야 자신의 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 잘못을 깨닫게 하는 의무나 규칙, 혹은 사실을 알지 못하면 전혀 죄의식도 없고 죄책감도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결코 이상하거나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는 심지어 뺑소니사고를 저지른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차가 접촉했거나 혹은 사람이 부딪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갈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에게 죄의식이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허물인지 죄인지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혀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전혀 알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 그것은 허물이요 죄였지만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죄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이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망가뜨린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계속해서 그런 일을 하는 행동은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키고 스스로 화를 초래하게 만듭니다. 이는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젓가락을 콘센트에 집어넣거나 동전을 삼키려고 하는 행동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보는 사람에게는 가슴 철렁한 일이지만 당사자는 전혀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이런 상태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값으로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생겨나는 모든 불이익과 고통들을 다 면하게 하시고 친히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그 죄와 허물의 결과는 사망이지만 우리는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10, 11절이 잘 보여줍니다. “[갈]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그러나 이런 일은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죄와 허물을 저지르고 삽니다. 좀더 다른 차원에서 좀더 높은 수준에서 계속적인 죄와 허물이 있습니다. 차라리 믿지 않는 자였을 때보다 오히려 믿는 자일 때 저지르는 죄와 허물을 더욱 중하고 강하게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잘못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십니다. 더 벌을 내리실 수 있는데도 말이지요. 많은 불신자들이 기독교인의 범죄에 대해서 더 열을 올리며 성토하고 비방하는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 가운데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음 가운데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는 죄에 대한 용서를 통해서 죄를 짓지 않고 살게 하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12, 13절입니다. “[갈]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고 앞으로는 그 죄사함 속에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 가운데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가운데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서커스 줄타기 연습장에는 아래에 그물이 쳐져 있습니다. 그 그물이 있기 때문에 줄타기를 연습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연습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는 까닭은 다시 그렇게 살지 않고 바르고 의롭게 살아가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보여주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령의 약속’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14절의 말씀입니다. “[갈]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성령의 약속은 우리를 마침내 의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줍니다. 그 뜻을 이루시기까지 성령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시며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여전히 항상 함께 하시면서 계속해서 용서해 주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죄와 허물 가운데 있습니다. 의식하던 의식하지 못하던 우리는 항상 저주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속에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연습합니다. 노력합니다. 안되더라도 계속 이루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이 줄타기 연습장에 그물이 있는 이유이고 마침내 시간이 흐르고 나면 줄타기를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죄사하심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오늘도 노력합시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우리로 하여금 마침내 자녀의 모습을 이루게 만들것입니다.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맙시다. 아무리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그리스도의 그물은 우리를 다시 위로 올려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그물은 우리를 결코 놓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확신하며 더욱 담대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로 노력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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