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가 나의 거룩히 구별한 자에게 명하고 나의 위엄을
기뻐하는 용사들을 불러 나의 노를 풀게 하였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이 세계를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핵심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도자기 장인이 자기가
만든 도자기를 깨뜨릴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에 이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언젠가 그 심판은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단지 환경재앙이나 전쟁을 통해 재앙을 의미하는 것이 압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사람이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러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다시 사람을 통해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하나님 만이 파괴하실 수 있습니다. 노아의 때에 인류가 홍수로 멸망하였던 것처럼 마지막 때에
세상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 만이 하나님의 것을 좌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최종적이고 영원한 심판이 오기 전에 하나님은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방법인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3 내가 나의 거룩히 구별한 자에게 명하고 나의 위엄을
기뻐하는 용사들을 불러 나의 노를 풀게 하였느니라”
세계의 역사는 이러한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사람들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곳에서 포로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포로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다시 경외하였을 때 비로소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와
바벨론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근대사에서 1914년에 독일이 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을 때 하나님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동맹국을 대항하여 싸우게 하셨습니다. 결국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2차
세계대전은 다시 독일이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고 가장 많은 4천만명의 인명피해를 내면서 진행되었습니다. 결국 독일, 일본, 이탈리아,
비시 프랑스, 등등의 동맹국에 대해서 미국, 영국, 폴란드, 자유 프랑스, 중화민국, 러시아 등등이 연합국으로 대응하여 독일과 일본의 항복으로
끝이 났습니다.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 사람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한번씩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 행하시는 것은 악과 죄와 오만과 거만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11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그들이 즐겼던 악과 죄는 전쟁이 일어남과 동시에 모조리 사라져 버립니다. 또한 오만과 거만이 있었던 나라는 슬픔과 비극과 괴로움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 이전에 행복과 즐거움과 기쁨이 있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나라는 전쟁을 수없이 겪어보았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은 우리가 하나의 나라가 된 다음에 일어난 외부의 침입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는 끊임없는 전쟁의 삶이었지만 너무나 오래
전이라 지금 생각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욱 우리에게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625전쟁과 일제의 강제합병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슬픔과 좌절입니다. 헤어짐과 이별이 전쟁의 상처가 됩니다.
여러분은 ‘이산가족찾기’를 기억하십니까? 가족끼리 형제끼리 부부끼리
헤어져서 이곳 저곳에 떨어져서 살다가 이산가족찾기를 할 때에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만나서 눈물을 흘립니다. 고생조차도 함께 하지 못하고 홀로
남겨진 사람들은 너무나 괴로운 삶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슬픔을 겪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또한 빈부귀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 모든 죄와 악과
오만과 거만을 심판하십니다. 부자에게만 죄와 거만이 있는 것일까요? 가난한 자에게는 거룩과 신실함이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의 죄와 악과 오만과 거만이 있습니다. 그것이 모두 심판받고 정죄됩니다. 이것은 신실하고 정직하였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도 그러한 경우가 나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신실한
사람들이었지만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도 가족과 헤어지고 살던 곳에서 더이상 살수 없었으며 이전에는 귀족의 자녀들이었지만
바벨론에서는 포로로 왕의 일을 하는 사람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믿는 사람들이라도 나라 전체의 심판과 불행에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고통당할
때 같이 고통 당할 수 밖에 없고 슬픔도 함께 겪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런 일을 통해 하나님의 뜻하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 하나님께 대한 정절을 더욱 지키기로 하였습니다. 더욱 주님만을 의지하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미움과 원망이 있다면 결코 그렇게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심판 속에서 하나님과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달려 있던 죄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죄임을 깨닫고 그것을
이해하며 고백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것이 자신의 죄임을 거부하고 죄 중에 살았음을 부인할 때에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심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625전쟁이 있었고 그래서 일제치하가 있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제치하에 있었을 때 일본은 가히 무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상대로 싸웠고 또한 함께 세계대전을 이끌었던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물리치셨습니다. 일본에게는 원자폭탄을 허락하셨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각각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 패전함으로써 전쟁에서 패배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마치 현대시대의 바벨론과 같은 아성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벨탑을 무너뜨리시는 것처럼
바벨론을 무너뜨리시고 새로운 바벨론은 하나님이 다 망하게 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19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리니”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왜 망하였겠습니까? 그
거만함과 오만 속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그들은 스스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섰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한계와 금지를 두시지만 그것을
인간이 넘어설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치십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불로 치심을 받아 완전히 불타버리고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의 온상인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바벨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열국의 영광이고 갈대아 사람이 자랑하는 바벨론은 한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하였지만 그 죄악과 거만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그러한 멸망과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항상
거만하지 않고 죄악을 행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가져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거만함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바벨론처럼
망할 것입니다.
2008년 미국의 경제가 휘청하면서 세계의 경제위기 찾아왔을
때 우리 나라도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미국의 경제는 세계의 모범이고 세계 경제의 원동력이었는데 설마 미국이 흔들릴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부동산이 하락하고 기업이 문을 닫고 실업사태가 이어지면서 미국경제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사람들은 무턱대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다가 큰 낭패를 보고 그로 인한 큰 피해를 각 개인들이 겪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앞으로는 이런 일에 어떻게
준비해야 할 까를 고민하며 여러가지 방법을 궁구하였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방법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궁극적인 방법은 오직 성경에만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진정한 방법을 찾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22 그 궁성에는 시랑이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한 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그 방법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언제든지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어려움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현재의 평안이 계속 지속되리라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어려움은 찾아옵니다. 안이하고 나약한 생각이 급진적이고 도발적인 위기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가까워오리라는 것을 기억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권능과 힘을 기억하고 그분을 두려워할
대로 두려워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능력을 잊지말고 늘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움 없는 자로 서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더 길어지고 더 많은 기회와 은혜를 주님은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넘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