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3:2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창]23:3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창]23: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그리스도인의 생활 목표를 생각할 때 부부가 가져야 할 목표로서 ‘백년해로’를 생각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부부 자신에게 먼저 제일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그 외에 자녀나 부모의 경우에도 역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자녀들도 부모님이 백년해로를 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부모님들도 자녀들이 결혼을 해서 백년해로를 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마찬가지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부부가 백년해로를 한다는 것은 가정의 안정과 평화를 지키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매번 갈등 속에서 이혼이나 재혼을 반복한다든지 아니면 결혼을 못하고 혼자 산다든지 하는 것은 안타까운 모습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가장 좋은 모습을 목표로 해서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자 할 때 우리는 그에 맞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혹은 그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그와 비슷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백년해로를 할 수 있는 중요한 마음의 목표가 오늘 성경말씀에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도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부모나 자녀가 백년해로를 하기를 바랄 때 어떤 의식이 그렇게 끝까지 나아가게 하는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사 지내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세상을 떠났을 때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1절부터 보십시오.
“[창]23:1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창]23:2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사라는 백 이십 칠 세를 살았고 그는 백 년 이상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사라가 누린 삶의 시간이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한 인생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백년해로라는 것은 결혼 전의 삶보다 결혼 후의 삶이 더 많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백년해로를 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결혼 전의 삶으로 돌아가려는 의식이 아니라 결혼 이후의 삶으로 나아가려는 의식입니다. 결혼 이후가 더 많은 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결혼의 시간에 하나님 안에서 의미를 발견했을 때 아브라함은 사라와 백년해로를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사라를 위해서 슬퍼하며 애통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와 함께 살면서 결혼 전 삶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혼 후 삶에 적응하며 살았습니다. 그럴 때 백년해로가 이루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백년해로의 원리를 두 사람이 부부로 잘 만났을 때만 가능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 번 만남으로 두 사람의 차이를 완전히 해소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혼이 한 번으로는 부족하고 두 번, 세 번 해봐야 진정한 대상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몇 번을 결혼한다 하더라도 두 사람의 차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정말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 사람의 차이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지막 사라와의 이별 속에서 가장 큰 차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시기의 차이입니다. 그럴 때 그는 자신을 위해서 슬퍼하며 애통한 것이 아니라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했습니다. 그런 의식이 바로 지금까지 부부로서 두 사람이 백년해로를 할 수 있었던 근원입니다. 두 사람의 차이에 적응하기 위해서 배우자를 위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럴 때 마지막에도 죽은 사라를 위해서 슬퍼하며 애통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부부는 전부 이러한 의식을 가질 때 백년해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 놓을 때까지’ 부부는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백년해로를 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는 백 년 원수일 것입니다. 그리고 배우자가 죽을 때 마침내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전까지는 구속과 속박과 얽매임 속에서 살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년해로가 더 좋은 것이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배우자를 ‘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위하여 장지를 구입하였습니다.
“[창]23:3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창]23: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그가 슬픔을 거두고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가서 말할 때 그는 그들에게 있는 땅 중에서 시신을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서 나의 죽은 자를 장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은 사라를 ‘나의 죽은 자’라고 지칭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표현 같지만 앞서 살펴본 ‘사라를 위하여’라고 한 말과 연결시켜 보면 지금까지의 백년해로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배우자는 ‘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만 이전에는 나의 산 자였고 지금은 나의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상태이든 아내를 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은 분명합니다.
백년해로를 방해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나의 사람인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나의 사람이 아니었던 때를 회고하고 나의 사람이 아니기를 바란다면 결국은 백년해로는 이루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나의 사람이라는 관계와 친밀함을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흔들림 없이 관계를 개선해 나갈 수 있습니다. 좋든 싫든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백년해로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까지 흔들리지 않고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백년해로는 중요한 덕목이자 목표입니다. 그것이 초혼이든 재혼이든 삼혼이든 상관없습니다. 어떤 상태이든 백년해로가 목표일 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배우자를 위해서 또한 나의 사람임을 깨달으며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배우자를 굳게 붙들고자 할 때 힘과 능력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렇게 부부가 하나님의 목표를 붙들게 되면 가정이 발전되어질 것이며 부모나 자녀가 그렇게 산다면 그로 인해 모두가 기쁨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삶의 목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해지고 그로 인한 열매와 결실이 날마다 풍성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