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3: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행]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행]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행]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13: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행]13: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행]13:51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행]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 13장의 마지막에 왔습니다. 13장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돌아보고 이 모든 일의 마지막은 어떤 것인지 살펴볼 것입니다.
맨처음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께서 바울과 바나바를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이들을 주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위해 파송하였습니다.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 바로섬에서
박수 엘루마와 총독 서기오 바울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복음을 방해하는 박수 엘루마를 징계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떠나 여러 곳을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의 한 회당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설교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에 나오는 것처럼 바울은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앞으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겠노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을 떠나 이고니온으로 향하였습니다. 이것이 13장 전체의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13장 마지막에서 중요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마지막 52절을 보십시오.
“[행]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그들은
거부와 반대에 부딪쳐 복음전파의 장소를 옮기고 있는데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왜 그들은 실의와
낙심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고 만족과 기쁨에 차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우리가 13장을 마치면서 깨닫고자 하는 복음 전파의 마지막이 어떤가에 대한 답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의 희생을 감수하며 애써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그 구원을 받아들일 때 얻는 놀라운 축복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받는 자만이 누리는 특별한 특권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을 말하여도 유대인들은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하고 핍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그곳을 떠나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50절에 나오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경건한 귀부인들과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였고 그 지경에서 쫓아내버렸던 것입니다.
“[행]13: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우리가
전도자의 삶을 살 때 경험하는 것이지만, 이런 경험을 겪고 나면 대개 커다란 마음의 상처가 남는 법입니다. 다시는 이곳에 두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이를 악무는 결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떠나면서 마음에 드는 심한 패배감과 자책감은 어쩔때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짐이기도 합니다. 핍박으로
인해 그곳을 떠나면서 느끼는 감정은 기쁨이라기 보다는 슬픔입니다. 즐거움이라기 보다는 괴로움입니다. 당연히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떠나 이고니온으로 향하는 제자들의 마음에는 절망과 낙심이 가득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정반대로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새로운 선교지에 대한 소망이 있었고 떠나온 선교현장에
대한 만족감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쁨과 성령의 충만함의 원인은 바로 이 말씀 때문입니다.
“[행]20: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행]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이
늘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모든 사람의 피’입니다. 그는 내가 복음을 증거하면 그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내가 깨끗하지만 복음을 증거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내가 깨끗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증거해주어도 그가 믿지 않으면 그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내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그에게 복음을 증거해 주지 않아서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내가 그 책임을 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생각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요? ‘사람의 피’에 깨끗하다
혹은 깨끗하지 않다는 이렇게 표현이 어떻게 나오는 것일까요? 바울은 무슨 근거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정말 우리가 ‘사람의 피’에
깨끗하거나 혹 깨끗하지 않다는 것이 사실일까요? 이 표현은 에스겔 3장에서
처음 나타났습니다.
“[겔]3: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겔]3: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겔]3: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사도 바울은이
말씀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만약 내가 복음을 내 주변의 사람에게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가 구원받지 못하고
죽는 것은 내 책임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복음을 증거해도 그가 듣지 않고 죽는다면 그것은 내 책임은
아닌 것입니다.
이 말씀이
진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사실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착같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이 당한
것은 복음증거에 대한 방해와 핍박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굴복해서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선동에 의해 그곳에서 끌려나올
때까지 떠밀려 나오게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들어야 할 사람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의 말씀은 그 지방에 두루 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기쁩니다. 그곳의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패가 아니라 성공을 했습니다. 좌절이 아니라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방해가 있었어도 들을 사람은
들었고 열매가 없었어도 나는 할 일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 기쁨은 주의 말씀을 믿고 따름으로 나오는 기쁨입니다. 에스겔서의
말씀이 기준이 아니었다면 기쁨이 없었겠지만 그 말씀을 믿고 따랐기 때문에 기쁩니다. 그럴 때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믿고 따르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과 바나바의 기쁨과 성령의 충만함의 이유였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복음전파의 결실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단한 성공일까요? 커다란 숫적 증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전파자의 기쁨과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이것이 복음전파의 마지막입니다. 그것은 허무와 허탈이 아닙니다. 주의 일을 했다는 자신감과 만족감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됩니다.
앞으로
주의 복음을 위해 더욱 애쓰시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모든 사람의 피를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거룩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증거하여 그 모든 짐을
내려놓고나면 홀가분하고 기쁨이 넘칩니다. 성령으로 충만합니다. 이와
같은 복음 전파의 삶을 살아서 평생토록 기쁨과 성령에 충만한 사람을 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