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화목] 49엡 2; 17-22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2Loading the player...
49엡 2; 17-22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2_5
2020. 8. 14. 금. 금요철야.
*개요: 에베소서 연구 [엡]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2: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엡]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엡]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에서 다룬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는 실제적인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성도의 연합과 사역에서의 동참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신앙의 모습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이러한 교회가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교회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는 교회에 대한 관여도나 연결성의 차이에서 생겨납니다. 삶이 교회로부터 멀리 있는 분들은 교회가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고 삶이 교회와 아주 가까이 있는 분들은 교회가 특히 중요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신앙의 차이이면서도 경험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신앙심이 크면 경험도 많을 것입니다. 반대로 신앙심이 적으면 경험도 적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의 연결성이 많거나 혹은 적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개개인이 이렇게 교회를 다양하게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깨닫는다면 교회가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사실 교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교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 더욱 더 교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17절말씀부터 시작됩니다. “[엡]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2: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먼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간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신 일입니다. 그 다음으로 하신 일이 바로 먼데 있는 자들과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신 일입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해서 그 둘이 함께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먼 데 있는 너희’는 이 에베소서를 읽고 있는 에베소교회와 및 다른 교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은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과 가까이에 있는 자들은 이미 예수님과 동일한 경험을 공유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까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큰 자들입니다. 그들 중에 제자들이 나왔고 사도들이 나왔으며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평안하뇨’라고 인사하셨고 ‘평안할지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삶이자 역사였고 문화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들이 믿음이 큰 자들이겠습니까?
그렇지만 ‘먼 데 있는 너희’으로 이방인이었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한계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삶과 규례를 지켜야 했습니다. 선지자들의 글과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야 했습니다. 여러가지 문화나 전통에서 이방인들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요 신으로 믿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서 믿었습니다. 단지 듣고 믿은 자요 깨닫고 믿은 자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믿음도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예수님은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 평안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서 가까운데 있는 자나 멀리 있는 자가 동일하게 한 성령안에 거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이 가까이 있는 자나 멀리 있는 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음이 큰 자나 믿음이 작은 자가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오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신앙심이 큰 자나 혹은 신앙심이 적은 자나 모두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 모든 자들을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후서에는 심각한 교회내의 문제가 많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교회에나 있을 수 있는 그런 문제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 속에서 고린도교회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쓰는 사도바울의 서신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문제로 인해서 성도들이 구원을 잃어버리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을 배제시켜 버리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만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도 끌어 안고 어떻게 해서든지 함께 하려고 했던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행하신 먼데 있는 자들이나 가까운 데 있는 자들이 다 함께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신다는 그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고자 할 때에 예수님께 교회에 주신 의미와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렇게 먼데 있는 자나 가까운데 있는 자가 함께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비로소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교회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사도바울도 에베소교인들에게 더욱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엡]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엡]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무엇인가 부족한 자로 스스로를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거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강한 자나 약한 자가 함께 하나님의 성도가 되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은 자신을 친히 모퉁잇돌로 바치셨습니다. 그 기초와 기준 위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리스도의 이 원리 속에서 모든 구별과 차별이 사라지고 모든 얽매이는 것들과 제한들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습니다. 이를 의지하고 우리가 담대하게 주님께로 나아갈 때에 비로소 교회의 의미와 가치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가 그러한 노력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멀리 있는 자나 혹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자가 부족한 부분을 끌어 안고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멀리 있는 자는 그대로 멀리 있는 그 상태로 있을 것이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던 자도 그냥 그대로 가까이 있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움직이시기 때문에 멀리 있던 자는 더욱 멀어지게 되고 가까이 있던 자도 점차 멀어지게 됩니다. 태양이 자전과 공전을 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태양 중심으로 모든 행상이 움직이고 있지만 사실 태양 자신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태양계는 하나의 주기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구는 공전하면서 움직이고 있는 태양을 따라감으로써 끊임없는 연관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감으로써 우리도 예수님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전의 교회가 그랬고 지금 교회가 그렇습니다. 앞으로의 교회도 그럴 것입니다. 그 당시의 주제가 이방인과 유대인이었을 때 교회가 열심히 이 둘을 하나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사는 자와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단지 믿음의 크기로 신앙의 크기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그 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삶 속에 얼마나 열매가 있는가로 규정됩니다. 그럴 때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모든 다양한 사람들이 전부 다 하나의 교회를 이룹니다. 교회는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을 따라 살 때에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이 됩니다.
교회가 이러한 의미임을 기억하고 그 속에서 교회의 한 사람으로서 그 의미를 실현하고자 할 때 우리도 역시 주어진 삶을 살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와 같은 먼데 있는 자와 가까운 데 있는 자가 함께 하나 되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배우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는 지식이 많은 사람도 있고 지식이 없는 사람도 있고 믿음이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고 의심이 많은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경우에 해당하는 우리들이 다 한가지로 하나되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지어지게 됩니다. 21, 22절을 읽어봅시다. “[엡]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주님 안에서 건물들을 서로 연결하여 성전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함께 지어져 가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어려운 연합을 포기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 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버릴 뿐입니다. 진정한 교회의 의미는 그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더욱 연합하여 함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비로소 지금까지의 모든 부족함이 완전하여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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