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20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21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이 세상에는 많은 다툼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 순간들은 모두
위기와 갈등의 순간들입니다. 다툼이 잘못되면 더 큰 화를 불러 일으키고 커다란 낭패를 당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런 시간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잘
해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냥 놔두었다가는 더 악화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를 더 크게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불이 났을 때 그 불을 끄는 여러 방법들이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불을 더 일으키거나 아니면
전혀 불을 끄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일은 화재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무조건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할 때 일어납니다. 기름에 옮겨붙은 불은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고 산에서 난 불은 오히려 불이 일어나는 반대방향으로 불을 더 붙일 때에
꺼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각각 다른 소화방법을 잘 알아놓을 때에 유사시 대처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각각의 갈등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를
해야 다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잘 화해시킬 수 있는 가를 아는 것은 인생살이에서 중요한 기술이 됩니다.
이를 위해 성경은 네 가지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 네 가지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마음의 상함을 붙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4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갈등 상황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마음의 상한 것입니다. 시시비비가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마음이 얼마나 상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분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몸의 고통까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신하들은 상전의 마음을 살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말에 기분이 상했을 때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돌이키게 했을 때 비로소 그의 마음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하5:13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지극히 간단한 말이지만 지극히 어려운 말입니다. 그들이 장군의
심기를 두려워하였다면 결코 그렇게 못했습니다. 그들은 장군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가졌습니다. 그럴 때 오히려 장군이 자존심 상해서 화를 내는 그것이
별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알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지혜를 응용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속썩일때) 그래도 혼자사는 것보다 낫지 않아?”
“(자녀의 성적이 안좋을때) 사고치는 것보다는 괜찮아”
이렇게 우리는 더 힘들고 괴로운 상태를 생각해 보면서 지금의 상태를 견뎌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그 고통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과 그가 처한 문제 상황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5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
고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결정해 버리게 되고 결국에는 전혀 다른 사람의
문제를 혹은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을 도우려고 애쓰는 것이 되버립니다.
엘리사도 때로는 알지 못하는 사람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그가 한 것은 그 고통이 무엇인지 듣는 일이었습니다.
“열왕기하 4:27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저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가만 두라 그 중심에 괴로움이 있다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괴로움이 무엇인지 들어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먼저 듣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세 번째는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17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
이것은 표면적인 요구사항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저변에 깔린 소원입니다.
결국에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때에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생기고 그 부분을 만족시키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의 원하는 것을 아는 일에 모종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다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듣다보면 그가
원하는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과부의 원망함을 들었을 때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녀는 결코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신의 괴로움을 말했습니다. 그 괴로움을 듣다보니까 할 수 있는 일이
나타나게 됩니다.
네 번째는 갈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21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화해를 시키기위해서는 화해를 시켜야 한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 열매를 맺고자 하는 노력이 결국에는 모든 싸움을 승리하게 만듭니다. 혀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 열매를 먹게 됩니다.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열매도 없습니다. 뿌리지 않은 것에 대해서 거두는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뿌리려고 한다면 많은 것을 거둘 수 있습니다.
아까 보았던 열왕기하 4장의 이야기가 결국 어떻게 결론나는가 보십시오.
“33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34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엘리사는 그 아들을 살릴 수 있었고 그 열매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적극적으로 어려움에 개입하여 도울 때에 그 열매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원리를 통해서 갈등과 다툼이 많은 이 세대에서 화해의 사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그럴 때에 어둠과 불의가 판을 치는 이 세대에서 빛과 소금되는 그리스도인으로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로 인해 많은 열매가 우리 삶속에 맺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가 우리 삶 가운데 넘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