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함] 40마 18; 23-35 긍휼을 받은 자의 긍휼함2Loading the player...
40마 18; 23-35 긍휼을 받은 자의 긍휼함2_5
2019. 5. 24. 금. 금요철야.
*개요: 마태복음 연구. [마]18: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18: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마]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마]18: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마]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마]18: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마]18: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마]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마]18: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마]18: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마]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마]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마]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천국에는 세상과 다른 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삶의 의미를 이 말씀 속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긍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긍휼을 실천한다는 것에는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긍휼을 베풀 만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받았기 때문에 긍휼을 베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 말씀의 시작은 주인이 그 종과 결산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18: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18: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임금에게는 만 달란트 빚진 자가 이끌어져 왔습니다. 그는 임금의 종이었지만 임금에게 만 달란트를 갚아야만 했습니다. 만 달란트는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하루 품삯을 10만원으로 치면 6조가 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그가 그렇게 많은 빚은 지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임금과의 관계에서 그만큼 잘못한 것이 많았고 또한 그 모든 것이 전부 자기 자신이 갚아야만 하는 빚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 차곡차곡 쌓아져서 댓가를 치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임금은 그 종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로 그를 긍휼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마]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주인이자 임금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서 빚을 탕감하고 놓아주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옥에 갇혀서 평생을 갚아도 다 갚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었습니다.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빚을 탕감하여 준 이유는 그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서 보여지는 일만 달란트의 탕감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 구원을 누릴 때 우리는 우리의 죄값을 사함받았습니다. 그 죄값은 우리가 지은 죄의 댓가였습니다. 내가 알고 다른 사람이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 죄가 있습니다. 또한 나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 죄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는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아시는 죄가 있습니다. 내가 모른다고 해서 죄가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동차 뺑소니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중에 몰랐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분명히 저지르고 그 행위의 기록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다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죄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영원토록 갚아야만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바로 그렇게 자신의 죄를 갚게 됩니다. 그들에겐 용서가 없습니다. 그들 자신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용서도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죄를 탕감해주시고 용서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때 결국 자기 스스로 죄를 갚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보험이나 의료보험이나 기타 등등의 모든 보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보험에 가입되어 있을 때에는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험이 없으면 전부 자신이 감당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진짜 보험은 보험이 아니더라도 감당할 만 하지만 죄문제는 결코 자기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심각한 범죄의 경우에는 이를 대신 해결해 줄 수 있는 보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지은 죄의 결과는 결코 우리가 정상적으로 갚을 수 있는 죄값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는 예수님의 대속이 필수적입니다. 그 대속하심을 통해서 우리는 죄값을 치르게 되는 데에서 놓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바로 이러한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는 그러한 죄사함이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탕감을 받은 종은 왕에게서 놓여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자신에게 빚을 진 다른 동료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탕감을 받고 놓임을 받고 자유를 얻은 것이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신에게 빚진 그 사람을 달리 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동료에 대해서 매몰차게 대했습니다. “[마]18: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마]18: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마]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는 자기에게 빚진 동료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습니다. 그 동료는 엎드려 간구하며 참아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은 놀라운 빚의 탕감을 받았지만 자신에게 빚진 자에게는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졌던 빚의 액수는 백 데나리온이었습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고 그 금액을 10만원이라고 할 때 총 액수는 500만 원 정도입니다. 바로 그러한 금액을 갚도록 자기 자신의 빚진 자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가혹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종의 모습은 바로 오늘날 긍휼이 없는 성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해 주셨고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원과 죄사함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삶 속에서 긍휼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구원과 대속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긍휼을 나타내는 삶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과 대속은 나중에 나타날 것이고 긍휼을 나타내는 삶이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과 대속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긍휼을 나타내는 삶이 따라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먼저 받은 구원과 대속을 기억한 다음에 그 기억 속에서 긍휼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긍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의 자신의 빚을 불쌍히 여김받았기 때문에 오백 데나리온의 빚진 자를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혜택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는 자는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 나라를 약속받았습니다. 그 약속 속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게 됩니다. 또한 모든 죄에 대해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는 죄의 심판을 받지 않고 그로 인한 고통 속에 살지 않아도 됩니다. 그 유익만 생각해도 우리는 기쁨과 감사를 가질 수 있습니다. 빚진 자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약 6조를 빚을 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 빚이 다 탕감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비록 6조를 얻은 것이 아니라 6조를 탕감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갚기 위해서 겪어야 했던 모든 고통을 생각해 보면 그 어마어마한 돈을 탕감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기분과 느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감사를 잊어버린다면 그 다음부터는 고통이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도 에덴동산에서의 감사를 잊어버리고 에덴동산에서 살 수 있다는 그 기쁨과 즐거움을 잊어버리고 더 지혜롭고 더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습니다. 그럴 때 자신이 누리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인이 직장에 다닐 수 있다는 감사를 잃어버리면 횡령이나 임무태만 등의 범죄를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가족이 다 건강하고 평안하다는 것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면 온갖 부정과 패악함을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미 얻은 것을 통해서 깨닫지 못하면 앞으로도 얻을 것을 얻하게 됩니다. 긍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받은 긍휼을 알지 못하면 자신이 행해야 하는 긍휼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다른 사람들이 그 긍휼하지 못함에 대해서 지적하게 됩니다. 이 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18: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자신이 긍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에게는 긍휼을 베풀지 않았을 때에 그 동료들은 그로 인해서 긍휼을 받지 못하고 옥에 갇히게 된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딱하게 여겼습니다. 그 악한 종의 긍휼을 나타내지 않는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슬픔과 분노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때 그로 인해서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그 긍휼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피해를 받는 사람들의 고통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로 인해서 나타나는 다른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런 증언들이 기사가 되고 인터넷에 올려지고 사람들이 공유하면서 나타나는 것은 그 모든 긍휼하지 못함에 대한 비난과 송사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비난과 송사로 인해서 하나님의 공의 심판이 다시 시작됩니다. 이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했던 종에게 주인의 분노가 쏟아졌습니다. “[마]18: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마]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마]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주인은 이전에 이 종의 일만 달란트를 사하여 주었을 때에 그는 단지 탕감받은 종이었습니다. 그럴 때 그는 많은 은혜를 받은 자요 많은 사랑을 받은 자요 커다란 긍휼을 얻은 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은혜를 나타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을 때 그는 그냥 악한 종이었습니다. 자신이 받은 선에 올바르게 반응하지 못할 때 그것은 지금까지 용서받은 일만 달란트보다도 더 큰 죄였습니다. 그래서 그 죄로 인해서 악한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서 모든 빚을 탕감하여 주었지만 그 종은 자신의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씁니다. 그래서 주인은 다시 그 종을 불러서 호통을 치고 그 죄와 잘못에 대해서 혹독한 심판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용서받았던 모든 죄는 다 무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모든 죄악에 대해서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는 사실 다른 사람을 긍휼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지금까지 지었던 모든 죄의 2배의 죄를 지은 셈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사함받은 죄가 다시 원상태로 되었으며 더 나아가 그 모든 죄를 다시 갚아야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2만 달란트의 죄값을 지고 주인에게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평생토록 죄값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주인이 노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주인이 분노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마]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은 종을 불쌍히 여겼지만 그 불쌍히 여김을 받고도 종은 자신의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받은 모든 긍휼함은 오직 자신의 완악함과 강퍅함을 변화시키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완악하고 강퍅하고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여전히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이 종을 불쌍히 여긴 것이 아무런 보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종은 주인을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는 주인의 불쌍히 여김을 무시하고 기만했으며 자신의 처지를 더 불쌍하게 보이게 함으로써 자신의 원하는 탕감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것은 결국 주인을 속인 것이고 주인을 능멸한 것이며 주인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 종을 벌하여 다시 그 모든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고 옥졸들에게 넘겼던 것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구원의 원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았다 하더라도 긍휼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긍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받은 긍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이 행할 긍휼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구원해주신 주님을 속이거나 업신여기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긍휼은 오직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그 긍휼을 나타낼 때 우리는 놀라운 긍휼을 받게 됩니다.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할 때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긍휼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긍휼을 실천한다는 것에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이 불쌍히 여길만한 자격이 되는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오직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긍휼을 우리 자신의 삶속에서 나타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받은 일만 달란트를 생각하고 우리가 받아야 하는 오백 데나리온을 포기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놀라운 긍휼이 우리 삶속에 이미 임하였음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 긍휼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4생활설교 관련글[더보기]16설교소감 관련글[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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