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만드시고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으신 피조물들이고 그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특별히 그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영토를 주시고 살 곳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백성이었고
나라였으며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들은 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자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조상 때로부터 섬기던 하나님을 그들은 400년이 지난 다음에야
알게 되었고 그들의 곤고함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이 새로운 땅을 얻어 나라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70년 광야생활을 통해 그들이 마침내 도착한 가나안땅에서
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개화기시대에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날마다 침체해 가는 우리 나라를 불쌍히 여기셔서 선각자들이 중국으로부터 복음을 배우고 그 복음을 한국에 알리게 하셨고 선교사들을
보내주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복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셨습니다.
놀라운 부흥운동이 초창기 평양에서부터 시작되게 하셨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일제치하와 분단, 그리고 6.25전쟁을 견디고 하나님을 굳게
붙들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땅에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중국과 소련, 일본이 호시탐탐 우리 나라를 정복하고자 하는 기회를 엿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균등한 힘의 균형을 통해서
우리나라가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셨고 이 땅이 복을 받아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 안정됨 속에서 우리 민족에게 열심과
열정을 주셔서 하루 24시간을 잘 활용하여 놀라운 속도로 이 세계에서 발전과 번영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서 끊임없는 애정과 사랑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열심과 의지가 그들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하나님의 나라로 받아주시며 그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7절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하나님은 절대로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선택을 성취하십니다. 그 선택하심을 버리시거나 혹은 빼앗기시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침내 그 열심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들을 위한 나라를 굳게 세우시며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보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열심이 바로 이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나라를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계속 불러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은혜가 너무나 큽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까지 베푸신 은혜가
너무나 큽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통 불교로부터 헤어나와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유교와 및 토착 종교로부터 벗어나와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종교가 없던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도를 배우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각별한 것입니다. 여러가지 기적과 은사를 교회사 속에서도 많이 부어주셨습니다. 방언을 하는 사람도 많고 각종 은사를 가진
사람도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밤중에 서울하늘을 보십시오. 수많은 십자가가 환하게 켜져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을 보십시오. 크고 작은 교회의 숫자는 너무나 다양하고 많아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많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우리 나라에
넘치고 있습니다. 해외의 사람들도 우리 나라를 보면서 놀란다고 합니다. 놀라운 경제성장과 놀라운 산업발전과 아울러 놀라운 신앙성장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스테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발전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그치거나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거나 중단하시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연약하게 될 때에라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은혜를 입으면서 살면서도 그 은혜가 고마운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기는 커녕 더욱 더 악하게 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떠났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모습을 보면서13절을 보십시오.
“13 이 백성이 오히려 자기들을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것은 그들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백성은 더욱 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다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더욱 더 그들을 치시고 흩으시며 벌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선지자가 있었지만 그 선지자는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였습니다. 백성들은 오히려 잘못된 거짓말만 들었기
때문에 더욱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와야만 했지만 그렇게 살지 못했고 멸망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기로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세상의 방식대로 세상의 가르침을 쫓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처럼 동일한 죄와 잘못을 저지르며 삽니다. 세상 사람들의 패역함과
부정함을 따라서 교회 안에도 동일한 범죄함으로 인해서 이혼과 불화와 살인과 범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안되는데 우리는 위험천만한 상태에 이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다시 돌이키고
하나님의 빛과 소금이 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징벌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그 뜻을 실천한다면
이스라엘에게 내리셨던 하나님의 징벌을 우리는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돌이키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말했을 때 니느웨가 회개함으로 그 도시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그 은헤를 받을 수 있습니다. 현대사에서 우리나라에는 몇 번의 전쟁위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위기를 다행스럽게 다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또다시 우리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엄청난 재앙이 되겠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런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백성을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래서
진노를 내리시는 것이며 재앙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21절에 이스라엘에 내리셨던
하나님의 열심과 의지가 무엇인지 나타납니다.
“21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의 연합된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서로 싸우면서도 합하여 남유다를 공격합니다. 그로 인해서 북이스라엘은 자멸하며 하나님의 범죄함 속에서 더욱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분노하심이 그들에게 임하고 있으며 그 정죄의 손이 더욱 그들을 붙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어려움과 문제를 겪습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일으킨
악한 일들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개인의 문제, 가정의 문제, 교회의 문제, 학교의
문제, 직장의 문제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참된 빛과 소금의 모습을 나타내지 못했음을 깨닫습니다. 이제 그러한 삶 속에서 우리도 여호와의 분노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여호와의 손에 의해 잡히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새로운 회개와 변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미국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당시 양을 훔쳐간 사람에게는
이마에 양 도둑의 약자인 S.T.(Sheep thief)라는낙인을 적었습니다. 일생 동안 다른 데 가서도 양 도둑질을 못하도록 하는 너무도 잔혹한
청교도적인 형벌인 것입니다. 어떤 두 사람이 다 양 도둑질을 해서 이마에 화인을 받았습니다. 둘 중의 한 사람은 회개하지 않고 먼 곳으로 도망
다니면서 못된 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마을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가서 다 도와 주고 대신 아파해 주고 대신 매맞아 주었습니다.
죽음의 자리가 있으면 대신 처해 주고 슬픈 사람 옆에 사흘이라도 같이 있어 줍니다. 그래서 그 동네와 이웃 마을에 서는 그 사람이 없으면 살 맛이
없어질 정도로 그는 동네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목사님보다 더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친아버지처럼 존경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많게 되자 양 도둑질을
하던 때 그에게 낙인을 찍었던 사람들이 다 죽고 그들의 2세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만은 오래 살았습니다. 2세들이 자라서 그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국민학교나 중학교 입학식 때에는 으례히 훈사를 하는 유명한 분이 되었습니 다. 당시에 이마에 낙인을 찍는 풍속은 없어졌습니다. 할아버지
이마에 어째서 S.T.가 붙었느냐고 묻습니다. 양 도둑의 약자와 성자(Saint)라는 말의 약자는 같지 않습니까? 너무나도 그분이 거룩해서 성자라는
낙인을 찍었다고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도둑이 성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했던 모습은 변화될 때에 강한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변화된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를
간직하고 새로운 모습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발전시켜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