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행]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행]16: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행]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행]16: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우리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나름대로 목표를 세웁니다. 그 목표는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기도 하고 현재를 충실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런 목표가 없는 삶은 순간 순간을 허비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목표를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럴 때 그 목표에 따른 준비하는 삶과 후회없는 충실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표를 세우는 삶에 어려운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 목표를 이루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상황이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만듭니다.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목표 세우는 일 자체를 포기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미래에 대한 목표과 그 목표를 하나 하나 이루는 즐거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목표없는 삶은 무료한 삶이요 허송세월하는 삶일 수 밖에 없습니다. 목적없이 그저 아무 생각없이
그어대는 직선은 아무 것도 만들지 못합니다. 그리고자 하는 분명한 모양을 생각하며 직선을 그어야 이
직선이 쌓이고 쌓여 나중에는 훌륭한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목표를 세우는
것이 될 것입니다. 목표를 세우긴 세워야 겠는데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할까요? 미래를 준비하게 하고 현실을 충실하게 살아가게 하는 목표란 어떤 것일까요?
그런 목표은
사정이 있고 상황이 바뀐다 하더라도 그 때 그 때마다 융통성있게 변할 수 있는 원대한 목표이어야 할 것입니다. 몇
가지를 세워놓았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까 다 포기하게 되는 그런 목표를 세워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할 수 있지만 결코 포기하게 되지는 않는 그런 목표이어야 합니다. 과연
이런 목표는 어떤 것일까요? 이를 위해서 그런 목표를 세우고 실천한 사람의 경우를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융통성있고 변함없는 목표를 세운 사람이고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가 애초에 세웠던 목표는 비두니아
쪽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비두니아는 아시아로 가는 입구같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면 아시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바울이 바라보고 있었던 곳은 아시아였습니다. 그 큰 땅을 보면서 그리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행]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행]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하지만
성령께서는 그곳에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로 가려고 바울은 애를 썼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마 상황적인 면에서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또한
정황으로 보아도 그리로 갈 형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성령님이 막으시는 것이 아니면 이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원하던 비두니아로 가는 길은 철저히 막혔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정반대편 유럽대륙으로의 길은 자꾸만 열렸습니다. 이것은 전혀 생각지 않았던 다른 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은 원했던 아시아로의 문에 비해서 더 넓게 더 활짝 열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밤에 환상을 보았는데 그 환상 속에서 마게도냐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와서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모든 정황이 아시아가 아닌 마게도냐로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행]16: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행]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여기서
바울은 고민했습니다. 아시아로 가는 길은 본인이 원하는 길이었지만 성령님이 자꾸만 막는 길이었습니다. 성령님이 막으시는 것이 분명하게 느겨질 정도로 그 길은 열리지 않았고 되지도 않았으며 여러가지 상황이 그를
막았습니다. 이에 반해서 마게도냐로 가는 길은 본인은 원하지 않는 길이었고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는
길이었지만 자신을 부르는 사람들이 환상중에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자꾸만 열려지고 있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바울은 고민했습니다. 어떤 것이 주님의
뜻인지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결정했습니다. 마게도냐로 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행]16: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주님은
마게도냐로 가라고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아시아로 가는 길을 막으셨을 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은
직접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서 마게도냐로 가는 길이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에게
필요한 것은 아시아로 가려는 자신의 목표를 포기하고 새롭게 마게도냐로 가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좌절이 아니었습니다. 포기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시아로
가나 유럽으로 가나 상관없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아시아로 가서 무슨 일을 해야 겠다는 것이 그의
소원이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더 큰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원대한 목표는
그 뒤에 사도행전 20:24절에 나타납니다.
“[행]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에게는
이것이 원대한 목표이었기 때문에 사소한 자신의 소원이나 가고자 하는 곳이 막히고 거부되었다 할지라도 더욱 감사함으로 그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랐던
것입니다. 어차피 아시아로 가나 마게도냐로 가나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평생 그 목표를 이루고자 노력했습니다.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되는 예루살렘과 로마의 가이사 앞에까지도 나아갔던 것입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하고 포기한다는 것은 고작 그 일이 내 평생의 목표로 세웠던 것임을 나타내는 것뿐입니다.
내 생애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던 목표라는 것이 고작 상황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었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넓은 원대한 목표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한 두번의
실패로 완전히 포기하게 되는 그런 목표 말고 평생에 흔들리지 않을 크고 높은 목표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목표는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쉽고 빠르게 전환될 것입니다.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꾸준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부디 하나님 앞에서 사도 바울처럼 크고
원대한 목표를 가져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주님을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