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요]11: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요]11: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요]11: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예수님이 참 하나님 되시고 참 사람 되심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설명할 때 중요한 원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이해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하고 참된 인간으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보자이시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부인한다면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음을 부인한다면 중보자로서 인간 대신 죽으셔서 죄를 사하여 주신 대속 사역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이 두 가지가 다 고백될 때 우리는 예수님은 온전히 믿는 것이고 그 믿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앞서 우리는 예수님의 참 하나님 되심을 살펴보았고 이제 예수님의 참 인간 되심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참 인간 되심을 생물학적으로 어떻게 태어나셨고 어떻게 자라셨음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좀더 중요하게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감정과 한계를 느끼셨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럴 때 참 인간이셨지만 죄는 없으셨던 예수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참 인간되심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인간이시기만 할 뿐이고 인간의 고통과 괴로움을 알지 못하시는 반인간의 수준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참된 인간으로서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다 느끼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진정으로 인간의 고통을 체휼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의 34, 35절은 예수님의 인간되심을 보여주십니다.
“[요]11: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셨고 그가 죽은 다음에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기 위함이었고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그를 살리실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찾아간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예수님 자신이 그 죽은 지 3일이 지난 나사로의 무덤을 살펴보는 것뿐만 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더 큰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실 때 나사로의 고통과 괴로움을 이해하셨습니다. 그의 죽음과 괴로움을 알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진정한 사람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나사로의 상황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예수님이 진정한 인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천사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제한이나 한계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인간이셨기 때문에 인간이 겪는 모든 한계와 괴로움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런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불쌍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 긍휼하심을 보면서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요]11:36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요]11: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예수님은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간되심은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심을 보여줍니다. 그 사랑하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던 것이고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사랑하심이 바로 예수님의 인간되심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만 긍휼히 여기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긍휼히 여기시고 이 세상의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사랑하십니다. 그들을 만드신 분이 바로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고 이 세상에 보내어진 각 영혼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구원받으면 가장 기뻐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기뻐하시고 그 구원을 이루도록 노력할 때 또한 기뻐하십니다.
그 인간되심의 시작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은 다시 찾아오시고 만나주십니다. 그것이 32절부터 나타납니다.
“[요]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요]11: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2절에서 시작되는 마리아를 만나시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시며 그 상황 속에 참여하시는 일이 지금 이 시대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지금도 각 사람과 각 가정과 각 세대에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인간되심을 기억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그 구원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도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 구원사역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 의미가 있고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의미 있습니다. 주님이 인간되심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인간이셨기 때문에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시간 속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참 인간되심과 구원하심을 기억하여 더욱 주님 의지하며 그 구원에 동참하면서 살아가는 충성스러운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